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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Aug 17. 2024

땡볕과 함께한 여름 배달 40일

7월 5일부터 40일동안 배민라이더로 일을 했다. 한여름 뜨겁다 못해 따가운 태양빛이 내리쬐는 땡볕 아래서 땡벌처럼 배달을 했다. 첫 주는 자전거 배달이 재밌고 신나서 행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서히 지치더니 8월 초부터는 더워도 너!무!나!도! 더웠다. 배달을 하는 동안 '덥다! 와! 덥다! 정말 덥다! 되게 덥다! 진짜 덥다!' 생각밖에 안 들었다. 배달을 하고 돌아보면 땀으로 젖은 옷에서 열대과일 두리안 향기가 났다. 인간 두리안이 되서 냉장고처럼 시원한 작업실로 돌아와 차가운 냉수를 벌컥 벌컥 들이 마시면 밀림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남극으로 순간이동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배민라이더로 등록하면 배민커넥터라는 어플을 통해 배달 배차를 받는다. AI가 자전거 구동계와 인간의 체력에 적합한 거리와 위치를 판단해서 배차를 해주는데 나를 주로 군자역, 세종대학교, 건국대학교로 보냈다. 대부분 잘 아는 지역이라서 길 찾기가 어렵진 않았지만 헷갈리는 데가 종종 있었는데 하루 2-3시간 40일을 자전거로 배달을 하니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감각이 제법 늘었다.


'음- 이쯤에서 좌회전! 그래 조금 만 더가면 주소지가 나올텐데 말이야! 오! 예! 난 천재인가!?'  


길찾기 감각뿐만 아니라 다리도 튼튼해진걸 느꼈다. 대부분의 배달기사들은 오토바이, 전기 자전거로 배달을 하는데, 나는 옛날 쌀집 아저씨들이 애용했던 기어없는 검정 자전거로 배달을 한다. 오로지 다리힘만으로 자전거를 타서인지 평소 헐렁하던 청바지가 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갱년기 탈출은 하체운동이 직빵이라는 말이 맞나싶다. 아직 갱년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공무원이 되기 전에 다녔던 직장이 우리나라 경륜, 경정, 스포츠토토 사업을 하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이었다. 경마는 말, 경륜은 사이클, 경정은 보트로 경주하는 배팅사업인데 경륜 선수들의 허벅지 두께가 엄청나다. 자전거 배달을 열심히 하다가 경륜선수로 전향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주로 11시부터 3시 사이에 배달을 했는데, 그때 배달주문이 집중돼있고 그 시간대에 일정 배달 횟수를 채우면 배민에서 보너스를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1:00-2:00 사이에 배달을 10건 하면 15,000원을 보너스로 주니 아무리 더워도 패달을 밟았지만 진짜 더웠다. 어느 날은  문득 '세로토닌합시다!'로 유명한 이시형 박사님의 예전 이야기가 생각났다. 박사님이 청년이었을 때 70도가 넘는 철판 구조물 내부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일을 마치고 40도 정도 되는 바깥으로 나왔는데 40도 날씨가 너무 시원했다는 것이다. 그때 인생은 상대적이라는 비밀을 깨달았다고 한다.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검게 타오르는 아스팔트도 눈부신 해변처럼 느낄 수 있다는 고차원적인 이야기다. 그 얘기가 떠올라서 '덥다! 덥다!' 하다가 '시원하다! 아! 시원하다!' 해봤는데 아주 잠-깐 효과가 있는 듯 했지만 더운건 더운거였다.  


배달을 하면서 가지 않았던 기피 장소들이 있었다. 모텔과 확인되지 않은 종교기관이었다. 배차 확인을 할 때 배달지가 모텔로 나오면 배차을 취소했다.


 '이거 맛있게 먹고 죄지세요!'


크리스천으로서 모텔이나 특정 종교기관에 음식 배달을 할 순 없었다. 배달 취소는 음식을 픽업하지 않은 상태까지는 라이더가 취소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음식을 픽업하고 배달 장소에 가보니 모텔이었다. 픽업을 하고 배달지까지 왔으니 취소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꾹 참고 음식을 주문한 호수로 올라갔다. 도착하면 전화를 해달라는 메모가 있어서 카펫이 깔린 복도에 서서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한 후 받지 않아 로비로 내려와 데스크에 음식을 놓고 사진을 촬영한 후 주문자에게 전달하고 모텔을 나왔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 배민에서 연락이 왔는데, 배달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음식 전달장소가 모텔이 아니라 모텔 옆 건물이었다. 내가 주소를 잘 못 본 것이었다. 오배달이 되어 주문자는 돈을 지불하고 음식을 못먹었으니 내가 음식값을 물어줘야 했다. 다시 모텔로 돌아가 음식을 챙겨 나왔다. 유부초밥 2인분과 볶음 우동이었는데, 저녁에 어린이대공원 앞 벤치에 앉아 혼자 맛있게 다 먹었다.


그렇게 가기 싫은 배달지를 거절하고 피해다니던 어느 날 음식을 픽업하고 배달 장소로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지하의 노래주점 같은 곳이었다. 군자역 부근에 이런 음침한 술집이 있었나 싶었다. 지하로 내려가기가 꺼려졌다. 내가 엉거주춤하고 있으니 지하에서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자가 내려오라고 했다. 둘러보니 입구에 CCTV 카메라가 보였다. 그 카메라로 날 지켜본 것이다. 더욱 불법스러운 업소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가는데 어둑어둑한 늪지대로 내려가는 것처럼 꺼림칙하고 나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어떤 아줌마가 앞치마만 입은 듯한 복장으로 나타났다. 눈도 안 마주치고 음식이 담긴 비닐봉투를 얼른 전달하고 뛰어나왔다. 간판도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체형관리 마사지업소라는 회전하는 원형간판이 붙어있었다.  불법 마사지 업소 같아 신고를 해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그 건물에 있는 김밥집에 가서 물어봤다.


"지하에 있는 마사지 가게 이상한데예요?"

"왜요? 마사지 받으러 가려고요?"

"아~아니요!"

"우리도 잘 몰라요."

"아....네...."


건물이 아주 커서 여러 점포들이 있었는데 어떤 사장님은 나에게 이상한 업소 같다고 했다. 불법 업소 같으면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신고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기분이 안 좋아 120으로 불법 마사지 업소 점검을 요청하는 신고 했다. 그렇게 배달을 가기 싫은 데가 있었는데 그럴 때 직업의 가치적 판단에 대해서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의사가 칼을 맞고 응급실에 실려온 조직폭력배 두목을 치료해주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배달하는 일이 가치중립적인 일일까? 배달을 하다보면 가게의 위생상태가 대부분 엉망진창이었는데, 특히 심한데는 배달을 해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배달 어플에서 맛있는 음식사진만 보고 주문한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저, 이 가게 지하 탄광처럼 더러워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때는 자신에게 말했다.  '여러 생각하지 말자! 내 일은 배달이고 배달은 가치중립적인 일이야!'


배달 자전거에 올라 울퉁불퉁한 도로 바닥을 달리면서,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지친 내 모습을 보면서, 땀바울이 빗방울처럼 주르륵 흘러 바닥에 '툭, 툭' 떨어질 때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왜 이러고 살까? 앞으로 어떻게 살까?' 생각이 들었다. 공무원 안 그만뒀으면 '주무관님~ 주무관님~' 소리 들으면서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 쐬면서 탱자탱자 놀텐데, 휴가도 팡팡쓰면서 편하게 살 텐데…. 며칠 지난 김빠진 콜라병안에 이산화탄소같은 허탈한 한숨이 나오곤 했지만 이상하게 후회는 되지 않았다. 공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 땡볕보다 더 공직이 힘들었던거야? 내 인생의 최대의 실수는 공무원이 됐던 거고, 더 큰 실수는 공무원을 그만둔 거야!'


마음 속으로 웃픈 잠정적 결론을 내리곤 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계속해서 책을 만들고 프리랜서 디자인 일을 본업으로 하고 있다. 일이 많고 바쁘면 배달을 못 하거나 안 할 때가 있는데, 땡볕에서 자전거 타는 게 습관이 됐는지, 햇볕이 뜨거우면 자전거를 타고 싶은 욕구가 들어서 신기했다. 사람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책을 만들면서 표지 디자인을 하고 원고를 편집하고, 내지 디자인을 하고 영어로 번역해서 아마존에 팔고 교보문고에 팔기 위해 파트너십을 맺고 할 일이 태산이다. 그래서 며칠 배달을 안 했더니 편두통이 와서 힘들다. 배달을 하면서 운동을 많이 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긴장된 마음과 자세로 계속 컴퓨터를 하니 몸에서 적색경고등을 킨 것 같다.


인생이 신기하다. 몸은 힘든데 몸에 근육이 붙고, 정신은 힘들지만 몸은 편한데 편두통이 오고,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다가도 알아가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자전거 배달을 하면서 사고가 날 뻔한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고 너무 더워서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니야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한 여름 땡볕과 함께 한 40일이 지나고 입추가 지나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가을이 오고 있는 걸 느낀다. 붉은 물감들로 물들 낙엽을 맞으며 가을바람을 타는 배달도 즐거울 것 같다. 한 여름동안 나와 함께 해주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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