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전역하고 2학년 1학기로 복학을 했다. 말로만 듣던 복학생이 된 것이다. 1학년때 학사경고를 두 번 받고, 1년 휴학, 2년 군대로 3년이 지나 학교로 돌아가니 1학년 때 같이 학교를 다녔던 여자 동기들은 대부분 졸업을 하고 몇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3년 후배들과 함께 2학년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다. 후배들의 동기 남자애들이 군대를 가서 생긴 빈자리를 우리 학번 복학생들이 채웠다. 그때만 해도 군복무기간이 2년 4개월 정도 되었으니, 3년 휴학을 하는 친구들도 많아서 복학생이 6명 정도 되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공실에 모여있는 멤버들이 함께 졸업할 것 같았다. 디자인과는 과제가 많다 보니 모두 전공실에서 살다시피 한다. 그래서 안 친해지려야 안 친해질 수가 없는 환경이다. 15명 정도 되는 우리는 거의 매일 합숙하다시피 하루 3끼를 같이 먹으며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캠퍼스는 강원도 춘천에 있었다. 감자를 좋아하고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순박한 학생들과 공부와 그림실력이 중위권인 서울 학생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매주 서울에 가는 나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던 친구가 생각난다.
"네가 매주 서울 가는 게 신기했어. 너 서울 사람이더라. 생긴 게 꼭 태백사람 같았거든."
나는 강원도 사람보다 더 강원도 사람처럼 생긴 서울 사람이었다.
남은 3년을 함께 할 후배들은 만 20세가 안 돼서 성년도 안된 친구들도 있었다. 대부분 무난한 캐주얼 옷들을 즐겨 입는 지극히도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 아주 예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수업 중에 사진을 찍는 시간이 있었는데, 사진 속에 찍힌 그 애는 유난히도 아리따웠다. 일반인들 사이에 껴있는 연예인처럼, 짱구만화에 등장한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처럼, 그 친구에게만 포토샵 뽀샤시 기능을 킨 것처럼 예뻤다.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머릿결, 깊고 사랑스러운 눈빛, 오똑한 코, 뽀얀 피부, 앵두 같은 입술, 배우 전지현 코에 있는 매력포인트 점까지! 그 친구를 찍은 디지털카메라를 보여주며 예쁘다고 감탄을 했다. 주위에 애들도 많았는데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예쁘다 보니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른 자판기처럼 예쁘단 말이 자동으로 나와버렸다.
그 친구는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예쁜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군대를 가게 되었다. 나는 워낙 약방에 감초처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스타일이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고 그 친구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의 남자친구의 빈자리까지 채워가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함께 쇼핑을 하러 가고, 서울에 놀러 가기도 하고, 카페도 갔다. 나도 그 친구도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 같다. 선물을 주고 과제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었다.
우린 여름의 늦은 밤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고요하고 어둑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지나고 있었다. 좌우로 둥글둥글하게 조경된 화단들이 펼쳐져 있었고, 초여름 나뭇잎들이 우거지게 자라 있었다. 듬성듬성 서있는 가로등 불빛 조명이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나란히 걷던 우리는 서로의 팔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걷기 시작했다. 내 손등을 그 친구의 손에 갖다 댔다. 친구는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몇 초를 걸었다.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이면서 하나가 된 듯한 짧은 순간이었다. 마치 원자를 하나씩 공유하고 결합하는 수소분자처럼, 그 몇 초 동안은 우린 선후배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그 이상이었다. 예술 대학이 가까워지자 그 친구는 나에게서 떨어져 걸었다. 그렇게 사귀듯 사귀지 않듯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시간, 그 친구와 캠퍼스의 인적이 드문 곳 계단에 단둘이 앉았다. 친구의 옆모습이 보였다. 이마, 속눈썹, 코, 입술의 실루엣이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 사랑스러웠다. 캠퍼스가 높은 곳에 있어서 계단에 앉아 건너편의 차도가 내려다 보였다. 유성처럼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지나가고, 차선의 곡선을 따라 별똥별처럼 사라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뽀뽀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뽀뽀가 하고 싶다고.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문득, 그 친구가 키우는 강아지가 생각났다. 강아지를 무척 좋아했는데, 심지어 강아지와 뽀뽀를 한다고 들었다. 그 생각이 드니 뽀뽀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나는 강아지의 코, 입에 뽀뽀를 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동물과..... 그것도 입으로 말이다. 입은 엄청난 기관이다. 말하고, 먹고, 숨 쉬는 기능을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슈퍼 멀티 기관이란 말이다. 언젠가 그 애에게 물어본 적 있다.
"어떻게 강아지랑 뽀뽀를 해?"
"너무 좋고 귀여우니까 하지!"
부끄러운 듯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을 했던 친구였다.
그날 로맨틱한 분위기는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한 듯 순식간에 평범한 현실세계로 돌아와 버렸다. 뽀뽀에 대한 욕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린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이 친구는 너무 나도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사귈 수는 없겠다고. 사귀면 뽀뽀도 해야 할 텐데, 강아지와 뽀뽀하는 사람과는 뽀뽀를 할 수 없으니, 이 친구와는 안 되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우린 친구로 남게 되었다.
서로가 서서히 멀어지고, 그 친구는 몇 번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잘 살고 있다. 집이 부자였는데, 지금도 외제차를 몰며 부자로 잘 살고 있다. 가끔 연락을 하고 옛 추억을 소재로 카톡수다를 떨 때가 있다. 오늘 문득 그 친구와의 뽀뽀 사건이 떠올랐다. 최근에는 기니피그를 키운다며 기니피그가 귀엽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기니피그와도 뽀뽀를 하는지 궁금하지만 물어보진 않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기니피그와는 뽀뽀하지 않겠지. 기니피그는 돼진데.....
지난 추억을 생각하니 오랜만에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에게 이런 아름다운 추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옛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