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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Jan 30. 2017

그 날이 떠오를 때면

이것은 페미니즘일까, 한 개인의 경험담일까



오늘 우연히 얼굴 책(FACEBOOK) 피드를 구경하다가 눈길이 가는 책 리뷰를 발견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에 관한 리뷰였나, 소개였나 여하튼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하고 제목이 독특해서 자서전 같은 픽션인가 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책을 다 읽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히 어떤 책이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는 책인 것 같았다.


나는 페미니즘이 뭔지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

그 기준이 애매하고 또 모호해서 내가 페미니스트인지 

세상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대체 어떤 것인지 모르겠어서 

일단 이 글의 서두에 난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페미니즘이 뭔 지도 잘 모르는 애송이임을 알린다.




내가 읽었던 짧은 이야기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지영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몇 번 버스를 타고 가냐 라고 대뜸 묻는다.

안면은 있지만 제대로 이야기 한번 나눠보지 않은 남자의 질문에 지영은 왜냐고 묻는다.

그러자 남자가 "데려다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더니 지영이 탄 버스에 재빠르게 올라타기까지 한다. 

핸드폰이 없던 지영은 자신의 자리 앞에 서있는 여자에게 부탁해 

아버지에게 버스정류장까지 나와달라는 문자를 남긴다.

지영이 내리자 남자도 당연하게 따라 내린다. 애석하게도 아버지는 정류장 앞에 나와있지 않다.

유난히도 캄캄한 밤거리를 두려움에 덜덜 떨며 걸어가는 지영에게 남자가 다가와 말한다.


너 항상 내 앞자리에 앉잖아.
프린트도 존나 웃으면서 주잖아.
맨날 갈게요, 그러면서 존나 흘리다가
왜 취한 취급하냐?


다행히 자신에게 핸드폰을 빌려줬던 버스의 여자가 달려와 그 남자는 도망갔지만

밀려오는 공포에 지영은 주저앉아버린다, 헐레벌떡 뒤늦게 뛰어온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말한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 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그렇게 지영은 알아서 잘 처신해야 한다고 배웠다.

위험한 길, 위험한 사람, 위험한 시간은 알아서 잘 피해야 한다고.


82년생의 김지영에게 일어났던 일은 92년생의 나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다.

수 차례 몇 번을 그런 일들을 경험하며 자라왔다.





댓글들이 참 기가 막혔다.

많이 나아졌다 싶다가도 이렇게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마주하면

참 먹먹하고 막막하고 답답하다.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혹은 이런 글과 비슷한 류의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다.

범죄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도 똑같은 남자다 말하는 게 아니다.


너무나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성추행, 섬희롱, 그리고 성범죄

그리고 당신의 생각보다 자주, 많이, 훨씬 노출되어있는 여성들의 위험을 알아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성범죄에 있어서 여성만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수적으로 훨씬 많이 여성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당신이 읽기에 페미니즘 경향이 짙을지도 모르지만

성폭행의 경험과 그 이후의 잦은 성추행, 희롱의 피해자로서 제발 제발 좀 알아 달라고 말하고 싶을 뿐.



15살의 나는 긴 팔의 후드티와 긴 힙합풍의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다리를 다쳐 한쪽 다리에는 깁스를 한 상태였다.

그 날 나는 시험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작은 동네여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대부분은 알고 있었는데

그 날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서있던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의심은커녕 이사 온 사람인가 보다 싶어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연스레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몇 층을 누를까 머뭇거리던 그 남자는 4층을 눌렀다.

그리고 갑자기 뒤에서 낯선 손이 나를 덮쳤다.

지금도 끔찍하게 또렷이 기억나는 한마디.


"내 좆 한 번만 빨아줘, 응?"


좆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좆이 무엇인지 그렇게 알게 되었고

온몸을 더듬대던 그 손이 내 인생 처음으로 접했던 가족 이외의 다른 남자의 손이었다.

다행히 나는 410호 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내게 더 큰 상처가 된 건 엄마와 아빠의 말이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평생 내가 용서하지 않을 부모님의 태도.


잊어라

잊고 앞으론 조심해라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옷도 조심히 입고 다니고 

행실도 조심히 하고 


아, 우리 엄마는 내게 "괜찮아?" 그 한마디를 해주지 않았다.

안아주지도 않았다.

공포에 엉엉 울던 나를 두고 외출을 했다.

나는 그 날 이후 엘리베이터가 무서워 매번 10층을 걸어 다녔다.

남자들이 무서워서 학교에 가는 데만 3시간이 넘게 걸렸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 기억에 살고 있다.


과연 정말 내가 문제였을까를 생각하면 난 도무지 나의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지하철, 택시, 버스 등 온갖 대중교통에서 미친놈들을 만나왔다.

그리고 그런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고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아주 흔한 일이라는 것을 친구들과 혹은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하며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여성으로서 꽤 잦은 수치심과 모욕을 느껴왔다는 것을.


성적으로 확실히 여성은 남성보다 약하다.

그리고 세상이 남성보다 여성을 크게 반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박자에 꿍짝을 맞춰야 할지 잘 모르겠다.


바지만 입고 다니면 치마를 입어라고 하고

치마를 입고 다니다 미친놈을 만나면 왜 치마를 입냐고 하고 


세상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며 술을 조금만 더 마시다 가라더니

그렇게 집에 돌아가는 길에 미친놈을 만나면 왜 그렇게 늦게 돌아다니냐 하고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자유

신나게 놀고 즐기고 조금 늦게 귀가할 자유

생각보다 난 여러 자유를 당연스레 억제당하고, 억제 해왔다.

누구의 탓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내 탓도 아니다.


세상에 쓰레기 같은 놈들이 당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많다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당신이 쓰레기라는 게 아니라

그 쓰레기들을 만난 우리가 대체 뭘 잘못한 건지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대답해 달라는 것이다.

여자니까 당연히 조심해야 한다면

당신 역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남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여자니까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당한 일을 당신의 가족이 당할 수도 있고 당신의 친구가 당할 수도 있고 

그러다 당신이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당할 위험에 여성이 좀 더 많이 노출되어 있으니 같이 인식하자는 말이다.




정말이다.

세상에 생각보다 쓰레기들은 넘치게 많다.

그리고 여성이 그 쓰레기들을 마주할 확률이 생각보다 많이 높다.





ps. 아버지의 행동을 두고 "아마도 애한테 화내고 일단 집으로 보낸 후 분노에 떨며 쇠파이프를 들고 놈을 찾아 거리로 나서는 게 아빠의 심정 아닐까?"라는 댓글을 봤는데 어이가 없어서 답글을 남겼다. 그 내용을 여기에도 올려두고 싶어 가져왔다.


"두 딸의 아버지라고 하시니까 꼭 댓글로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애한테 화내고 일단 집으로 보낸 후 분노에 떨며 쇠파이프를 들고 놈을 찾아 거리로 나서는 게 아빠의 심정이라는 것 저도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정말 딸을 위하는 일일까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딸이 기억하게 되는 건 결국 무서움과 공포에 떤 나에게 화를 내고 오히려 나를 나무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아버지입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 풀어주는 드라마틱한 상황 전개죠. 심지어 그런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도 딸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끝나는 게 대부분입니다. 평생 나의 편에 서주지 않았던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아껴준다 믿었던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땐 다른 무엇보다 다른 누구보다 딸의 곁에서 딸을 안아주고 딸을 지켜주고 딸과 함께 그 새끼를 잡아 족쳐주십시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지만, 사실 가장 상처가 되는 건 안면도 모르는 인간에게 당한 범죄도 평생 씻지 못할 상처지만 내게 등을 돌리고 간 부모님일 테니까요. 후에 아무리 널 위해서 내가 쇠파이프를 들고 그 새끼를 찾아다녔다 한들 거기에 감사하며 아버지를 이해하고 감동할 일은 굉장히 희박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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