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그 여자

by 이도경

시간이 흘러 봄이 되돌아왔다.

다시 나뭇잎은 푸르게 물들었고

그날은 바람이 촉촉할 정도로 비가 내렸다.

구슬을 머금은 잎사귀들.

그리고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우두커니 서있는 나.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져 만들어내는 둔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려보았다.


아주 드물게 사람이 지나는

그리 깊지 않은 숲속에

처음부터 그곳의 일부였던 것처럼

오두막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살면서 점심 때까지

잠을 자기도 했고, 시냇가로 가서 낚시를 하며

책을 읽기도 했다.


그녀는 언제나 같은시간에 나에게 찾아왔다.

1시가 되면 바구니에 샌드위치를 넣어서

오두막의 문을 부서질듯이 두드렸다.

난 항상 그 소리에 놀라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곤 했다.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며

그녀와 함께 따라온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밥 먹는 손으로 만지지 말라며 언제나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점심을 먹고 서로가 읽었던 책을 바꿔서 읽었다.

그녀가 무언가에 열중할때면

주위의 공기조차 차분해지는 듯했다.

변하지 않는 그녀의 포니테일은

너무나 순수해 보였다. 마치 어린아이의 눈동자처럼.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책을 읽다가도 따스한 햇살 아래

잠을 자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평화로웠다.

가끔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가 나를 보며 살며시 웃어주었는데, 사랑스러운 그녀의 미소를 기억의 심장부에 아주 선명히 새겨두었다. 지금도 지치고 힘이 들 때면 눈을 감고 그 아름다운 조각을 찾아 마음 속 깊이 들어가곤 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수없이 많은 후회를 했다.

누군가 평생에 걸쳐 할만큼의 후회를

난 단 몇 일만에 쌓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날은 지금처럼 봄비가 내렸고,

바람을 타고 물비린내가 났다.

기이할 정도로 숲 속은 투명해보였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점점 색을 잃어가..."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시간에 비하면

그것은 마치 연못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아주 적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일까. 어째서 그 시간이 우리의 첫만남의 순간보다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것일까.

나는 하루하루가, 그녀의 방문이 당연스럽게 여겨졌고, 소중히 다루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이 언제나 나를 향할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바보처럼 말이다.


한심한 나를 뒤로 하고 그녀는 떠났다.

새하얀 바탕에 노란 색 점들이 띄엄띄엄 자리잡은

우산을 들고, 검은색 고양이가 담긴 파블로프의 바구니를 쥔 채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녀의 고양이만이 나를 의아한 눈으로 뒤돌아보았을 뿐이었다. 비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렸고, 그것의 리듬에 맟춰

나뭇잎이 춤을 추었다.

떠나가는 발소리는 서서히 빗소리에 녹아들었고, 이내 하나가 되었다.


아,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째서 그것을 깨닫는 것은 내 손에서

그 순간이 떠나갈 때인 것일까.

그녀가 떠난 뒤,

나는허전함을 메우기 위해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일을 얻은 뒤에는 오두막에서 나와

도시에서 자리를 잡았다.

숲에서 지내는 동안의 그녀와 나의 시간은 뿌옇게 먼지가 쌓인 케이스 속의 기타처럼 일상에 뒤덮인채 그 빛을 서서히 잃어갔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바람에 실린 빗방울이 내 뺨을 적셨다.

눈을 뜨고 우산에 흘러내리는 빗물에 갈라진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비가 갤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고양이가 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뒤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것일까.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으나 소용없었다. 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빗소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감추는 비밀스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