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카레 냄새로 가득 찼다. 3분 카레를 데워서 먹거나 회사근무를 하다 한번씩 일본식 카레를 사먹은 적은 있다. 집에서 이렇게 카레를 대량으로 해 먹기는 오랜만이다. 커다란 솥 가득 카레가 보글거린다. 아내는 바닥에 카레가 눌러 붙지 않게 긴 주걱으로 계속 젓고 있다. 이런 온 집안 가득 카레 냄새... 아주 오랜만이다. 온몸으로 기억하는 소울푸드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어릴적 어머니가 해 주시던 카레 맛에 사과 더 들어갔다. 감자와 함께 입에 사각거리는 단맛이 새롭다. 맛있다.
어릴적 어머니는 한번씩 카레를 대량 생산하셨다. 커다란 솥 가득 채워 있던 카레를 일주일 내내 먹었다. 그래도 카레는 질리지 않았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한참 정신없이 먹다 보니 따로 사시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카레를 넉넉히 했으니 용호동에 좀 드리면 어떨까?' '사과가 들어간 것도 괜찮을라나?' '이정도면 달지도 않고 딱 좋은데? '그래? 그럼 싸줄테니 다른 반찬하고 갖다드리고 오세요.' 그렇게 이번 카레는 부모님 댁에까지 진출했다. LA갈비 등 다른 반찬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유독 카레를 보며 반기셨다. '카레는 식어도 뜨신 밥만 부우면 또 맛있어 진다' 어머니 반기는 목소리에 며칠전 병원에서 퇴원한 아버지도 안락의자에 앉아 부엌 쪽을 보고 있다. 그렇게 카레는 두 집에서 맹활약을 한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며느리에게 전화했다고 한다. 반갑고 고맙다고. 카레... 그게 뭐라고... 이번 토요일 오후는 카레 냄새로 가득하다.
문제는 설거지였다. 카레을 맛있게 비벼 먹고 난 설거지 거리를 겹쳐서 씽크대에 둔 것이 문제였다. 용호동 다녀오는 동안 말라진 솥 바닥이다. 겹쳐진 그릇엔 강황색이 배였고, 솥바닥은 아예 온통 샛노란색이었다. 맛있는 밥을 먹은 값으로 내가 설거지를 하는 데 그릇에서 강황색을 씻어내는 게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다. 마치 사기그릇을 구울 때 부터 있었던 색깔처럼 바닥에 은근히 깔린 색깔을 씻어 내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때라도 '카레그릇 설거지'법을 검색해 보고 솥을 씻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옆에 두었던 금속 큰 솥을 씻었다. 처음엔 아주 순조롭게 씻겨져 나갔다. 거품을 가득내 씻고 헹구니 별 무리없이 거의 대부분은 말끔해 졌다. 그때 적당히 타협을 하고 솥을 뒤집어 말렸어야 했다.
솥을 다 씻고 유심히 보니 바닥에 아주 연하게 강황색이 있는 것이 보였다. 액체세제를 다시 붓고 수세미로 다시 박박 문질렀다. 이젠 사라졌겠지 ... 물로 솥을 헹구며 기대했다. 전보다는 연해졌지만 아주 약간 노란색이 보였다. 최근에 시력이 떨어졌다더니 눈을 비비며 다시 보는데 분명히 바닥에 노란색이 보인다. 다시! 이번엔 베이킹파우더 가루를 붓고 10여분을 기다린다. 충분히 씻겨져 나갈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 뜬금없이 '그 많은 카레집은 설거지를 어떻게 하지?' 생각을 한다. 오늘 카레는 맛있고 맹활약만큼 마무리 설거지 뒷끝이 맵다. 다시 급속 솥바닥을 박박 문지르고 헹구고 확인을 한다. 아이고, 아직 연하게 남아있는 노리끼리 한 게 보인다. 이젠 오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오늘 내가 이 색을 못잡으면 내 세상은 망한다. 꼭 씻어내고야 만다.
'뭐하는데?' 설거지가 길어지자 건너방에 있던 집사람이 뭐라한다. '다 해갑니다요.' 대답을 하면서 냉장고에서 콜라를 찾았다. 유튜브에서 콜라가 금속의 녹까지 깨끗이 빼내는 것을 보았다. 솥바닥에 은근히 스며든 카레 색깔도 이 콜라의 위력엔 못 버틸것이다. 학습한 대로 콜라를 부어놓고 아예 싱크대를 떠나기로 했다. 잠시 휴전이다. 아내 옆에서 TV를 보고 있었으나 머리속엔 솥바닥에 색깔이 빠졌을거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솥바닥에 깔린 은은한 카레 빛깔과 이젠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한다. 이 결투가 끝나지 않으면 내일 태양이 안떠오를 판이다. 지구가 멸망할 판이다.
한참이 지나서 콜라를 비워내고 다시 솥을 잡고 박박 문지르고 헹구고 솥 바닥을 봤다. 그런데 AC! 아직도 아주 약간, 아주 약간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빼낼까? 부엌 씽크대 앞에서 서서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뭐 하는데?' 드디어 설거지 전문가가 나왔다. '이거 바닥에 카레 노란색이 아주 약간 남았는데 잘 안 빠져서...' '어디 한번 봅시다' 집사람이 솥바닥을 본다. 이젠 분명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아내는 해봤을 테니까! 강황... 너그들은 다 죽었어! '이거 다 씻었네' '엥? 내 눈에 분명히 노르스름하게 뭔가가 보이는데?' '아~ 이 정도면 이게 다 씻은 거야. 이 솥에 딴 거 하다보면 이 색깔은 다 날라가' '엉? 내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데!' '그냥 물어보지. 설거지 다 잘 했구만' '뭐시라!' 집사람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난 그 솥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이거 뭐야?' 싶다.
'이 솥에 딴 거 하다보면 이 정도는 다 날라가' 어떤 일이든 결과 도출을 위해서 아주 열심히 뭔가 한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완벽한 마무리를 하기 위해, 아주 잘 했다는 소리 듣기 위해 다시 보고 다시 본다. 아주 작은 뭔가가 아쉽다. 또 손 본다. 이젠 어느 정도 충분한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100%완벽하진 않은 것 같다. 여태껏 그런 식의 인생 불만족이 늘 있었다. 카레를 만든 솥바닥에 아주 아주 연한 강황색이 묻은 것처럼... 불만족은 늘 있었다.
하~ 그렇구나! 카레솥 설거지를 하다 작은깨달음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