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에게 1번이란 건

중학생의 일상

by 에원

내 본명은 김가현, 김나현과 같이 압도적으로 빠르지는 않으며, 더불어 내 성씨인 김 씨는 ㄱ 성씨 중 뒤쪽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번호는 항상 빨랐다.


초등학교에서는 남녀를 섞어서 가나다순으로 배열했다. 나는 주로 3번 정도의 번호를 유지했다. 반에 강 씨나 고씨, 구 씨가 있으면 그 아이들이 1번을, 반마다 존재하는 '김민준'이 2번. 내가 3번.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내가 현재 다니는 중학교는 (대부분) 여자가 1번부터 14번, 남자가 15에서 32번까지 배치된다.

생각보다 여자 김 씨들 중에서 나보다 이름이 빠른 애들이 없으며 강, 고, 구, 곽 씨들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거기에 나보다 이름이 빠른 남자아이들은 모두 뒤로 밀리게 된다 된다.


재작년 나는 2번이었다. 반에 강 씨 여자애가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엔 나는 그렇게도 하기 싫어하던 출석번호 1번이 되었다.




난 출석번호 1번인 게 정말 싫다.

1번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사실 별로 이익 볼 게 없다.


나는 '시작'이 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실 출석번호에 대한 고민은 학생이 아니면 하기가 굉장히 힘든(?)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름은 개명하지 않는 이상 쭉 같이하다 보니, 내가 항상 하던 번호대가 아닌 다른 번호대를 바라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나는 내가 이 씨나 박 씨처럼 좀 중후 반쪽, 10번을 넘어보는 게 소원일 정도다.

내가 10번대에 속하려면 반에 강 씨 간 씨 고씨 곽 씨 구 씨가 각각 두 명씩 있어야지만 가능하려나?ㅎ


반면 내가 알던 황 씨 친구는 마지막의 설움을 아냐고 내게 토로하기도 했다.




1번의 단점을 간단하게만 서술해 보자면, 우선 당연하게도 모든 일을 첫 번째로 하게 된다.

첫 번째는 나머지 서른 명 가까이 사람들에게 비교의 대상이 되며 예시가 되고 표본이 된다.

시작을 해야 하는 건 나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시작한 위치를 따라가면 된다.


만약 내가 틀렸으면 선생님이 날 지적하실 테다. 그럼 유출된 정답으로 2번부터 그쪽으로 가면 그만이다.

물론 처음이니까 내 실수를 가볍게 넘어가는 경우도 많긴 하다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첫 번째의 불안감이나 책임감 따위는 쉽게 가벼워지지 않는다.


가창평가나 각종 체육 평가와 같이 모두 앞에서 단독으로 수행하는 경우에는 더하다. 경험상 10번대를 넘어가면 아이들의 집중도는 확 낮아진다. 처음의 집중도와는 비교할게 안된다. 또 준비할 시간이 미쳐 모자란다는 것도 미미한 단점 이긴 하다.


체육 수행평가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께서 나와 마지막 번호인 32번을 가위바위보 시켜서 시작할 방향을 정한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늦게 하길 바라고, 앞번호인 여자애들은 나보고 이기라고 응원한다.

그건 내가 쉽게 이뤄 수 없는 요청사항이다.


나는 대게 진다. (질 때가 부각돼서 이렇게 느끼는 건가?)

뒤돌아보고 가위바위보를 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졌는지 이겼는지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 뻔하다. 아직 성장 중인 여자 아이들의 표정은 쉽게 감춰지지 않고 굳어버린다. 나는 과하게 미안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맨 처음은 나인데, 걔네들한테 미안하기보다 나한테 미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어느 정도 미안하다는 말과 '으아...! 안돼!' 같은 반응을 하긴 하지만.


이렇게 내 반응도 가벼운 만큼 친구들의 가벼운 원망은 이해할 수 있다. 배구에 자신이 없는 애들은 당연히 더 연습하다가 뒷 순서에 하고 싶을 수 있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러니까.

그렇지만 가끔 그 아이들의 원망은 내가 용인하기에는 너무 심한 부분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그저 가위바위보 한판에 이렇게까지 원망을 받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것도 내가 1번이라서 억지로 했던 가위바위보에. 내가 자진한 것도 아닌데.


한 번은 날 엄청 심하게 원망하고 뭐라고 하던 3번 친구에게 맞받아쳤다.

그럴 거면 네가 가위바위보 하라고. 넌 해서 이길 수 있냐고. 걔는 웃으면서



'에, 내가 그건 못하지, 당연히 못하지~~ 그런 걸 어떻게 해~~'



이러고 넘어갔다.


난 매번 하는 걸 넌 왜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도 못한다. 그냥 시키니까, 1번이니까 하는 거지.

이름 덕에 필연적으로 1번의 번호를 절대 받을 일이 없을 그 친구가 과연 내 마음을 이해할 날이 올까?


첫 번째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반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받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한다

어쩌면 1번 자체의 문제가 아닌, 주변 시선과 기대감의 문제, 혹은 나의 성격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런 1번의 단점을 요긴하게 써먹었던 때가 단 한번 있다. 바로 작년 1학기 회장선거 때.

여태까지 읽었다면 알겠지만, 난 나대는 것도, 튀는 것도, 나서는 것도, 대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주목받는 것도 그다지.

딱히 내성적이라는 것보다는 책임감을 지닐 자신이 없는 그런 애다.


그때 우리 반에서 몇몇 아이들이 회장 후보 서류를 냈으나, 선생님은 내가 하길 원하셨던 모양이었다. 학기 초 상담이었던 그때 선생님은 내일 있을 선거에 출마하라며 내게 서류를 주셨다. 준비된 공약도 내세울 것도 없고, 사실 별로 뽑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이왕 나갈 거면 최선을 다하자... 마인드.


그때 회장으로서의 자질로 사람들이 많이 꼽는 것이 어쩌면 1번이 겪어야 했던 많은 것들과 유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그렇게 나가게 된 회장선거.

공약은 늘 중학교 선거에 나오는 흔해빠진 공약. 그러나 아마 번호와 관련지은 부분이 아이들의 마음을 울린 듯했다.



올해 제 번호이기도 한 1번은 모든 일에 먼저 나서고, 잘해도 못해도 결국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시, 발받침이 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면이 싫어서 올해는 제발 1번은 되지 않길 빌던 저는, 회장이 된다면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반을 위해 먼저 나서고 발받침이 되는 회장이 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원래 근사한 말을 늘어놓을수록 유리하다)


여자후보 한 명에 남자후보 둘. 여기서 떨어진 두 명이 부회장선거를 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1대 1로 붙으면 머릿수가 더 많은 남자가 당선된다.

즉. 나는 회장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짜릿하게도 나는 한표 차이로 당선이 되었다.

게다가 날 뽑은 아이들 수가 여자아이들 수를 넘는 숫자라 기분이 더 좋았다. 사실상 2학기엔 인기투표, 1학기엔 성별투표인 중학교 회장선거에서 남자애들의 표도 얻었으니 나는 정말 정당히 당선이 된 것이다.


투표로 당선된 첫 번째 회장이었고 다행히 작년 우리 반이 너무 좋아서 나는 1학기 동안 최선을 다해 회장 역을 맡았다. 중간에 담임선생님이 임시 교체되는 일도 있었고 여러 고난이 있었지만 상당히 재밌게 1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사실 내 입으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수행했다.




이렇게 작년 일을 주저리주저리 써놓는 나도 참.


3학년때도 내가 1번일 거라 예측한 지는 오래.

올해는 투정 부리지 않고 묵묵히 1번의 책임을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주에 반배정과 함께 나온 번호에, 당연히도 내 이름 옆에 쓰인 1번이란 번호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개학, 중학교 마지막 학년을 시작하게 된다. 학생에게 새해는 3월이다. 드디어 새해 느낌이 난다.

다행히 작년에 제일 친하던 둘이랑 같은 반이 되어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내일도 묵묵히 학교에 가야겠다.

가서 1번의 책임을 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