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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ice Oct 15. 2024

홀로서기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긴다. 늘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에너지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극 외향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내가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라기보다 타인에게 지나친 의존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이 내가 의존하는 대상이었다. 중요한 일은 항상 부모님께 여쭙고 부모님의 판단에 많은 무게가 실린 결정을 했다. 부모님의 지혜를 빌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회피하고자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나의 의존의 대상이 상당 부분 남편으로 옮겨졌다.

의사결정에 대한 공유와 의논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나는 늘 결정을 맡겼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결정에 따른 책임의 내용이 감당하기 버거울수록 더욱 그랬다.


그래서인가 나한테는 남탓하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다. 남편이 아주 경멸하는 내 태도이고, 스스로도 아주 밉상으로 여겨지는 내 모습이다. 

내가 책임지기가 두려워 남에게 결정을 미루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발생하면 조언을 해 준, 내가 결정을 맡겼던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상대가 나에게 호의적이거나 가깝다고 여겨질수록 더 그랬던 것 같다. 주로 그 대상이 엄마였고 남편이었다.

한 뇌과학자인 교수님이 우리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화를 낸 사람이 '엄마'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뇌에서 나를 인지하는 곳에서 엄마(혹은 가까운 가족)의 존재를 함께 인지하면서 생기는 결과라고 하였지만 그것이 나의 잘못의 어느 정도 방어해 줄 변명의 이유가 된다고 해도 나의 그런 태도를 별로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성인이 되었고,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나이 오십의 중년이지만 아직도 나는 온전히 독립된 개체로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함부로 탓하면서라도 의지했던 가족들이 언제나 영원히 나와 함께 있어 줄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의 상태에서 혼자 남겨지는 상황이 되면 나는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아마 더 이상 행복하지도 않고 제대로 살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진정한 홀로서기는 물리적 나이의 성인이 되었다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누구나 다 언젠가는 반드시 홀로서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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