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비행기를 이제껏 타고 내렸다. 그 오랜 시간 여행을 다니면서 어느 비행기를 타건 늘 설렘이 가득했던 걸 보면, 나는 정말 타고난 역마살의 최고봉인 건 확실한 듯하다(미래의 예언을 들어봐도 늘 나오는 첫마디는 언제나 글로벌/해외/역마살).
내 여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도착할 여행지에 만날 친구가 있는 곳과 없는 곳. 누군가 나를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행이라도 할라 치면 비행기가 지연이 되고 수속이 오래 걸릴까 봐 기내에서부터 전전긍긍하기 일쑤이다. 어느 나라이든 공항은 늘 차대기가 힘들고 대기자는 예측불허의 이유로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늘어지기 때문이다. 한 번은 미국 동부 여행을 할 때의 일이었다. 캐나다 퀘백을 갔다가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겨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여정에 나는 폭설을 만났고 내가 탄 비행기는 무사히 뜨고 착륙도 했지만 많이 지연이 되었다. 공항에서 어린 아이 둘을 옆구리에 끼고 나를 기다리던 내 친구와 아이들은 하염없이 전광판을 보며 내 비행기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배가 고프고 졸리다며 이미 지쳐하던 아이들에게 어찌나 미안했던지. 바로 친구네 집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하며 나는 지친 여행의 피로감을 모두 떨쳐낼 수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따뜻하게.
남자 친구가 있는 도시로 여행을 가면 내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긴 시간의 비행에 잔뜩 부은 얼굴과 몸, 들뜬 화장을 가리고자 비행기 하강 바로 전 메이크업을 전부 손봐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살짝 정신 나간 사람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행복해했었다. 공항에서 1분이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기내에서부터 짐을 들고 있다가 냅다 뛸 준비를 하곤 바로 뛰쳐나가곤 했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비행기가 착륙해도 차분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착륙하는 와중에서부터 일어나 자기 짐을 찾고 서있지 않기에 나의 이런 행동은 종종 튀긴 했지만 그 당시엔 사랑에 눈이 뒤집혀(?) 있던 때라 보이는 것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진심!).
한 번은 도쿄에서 인천으로 오는 비행이었다. 가까운 거리라 마음을 너무 편안히 먹었던 건지, 비행기 문이 닫히고 이륙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나의 비행기는 1시간이 지나도 이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풍으로 인해 비행 이륙이 지연되고 있었던 것. 기내는 이미 술렁였고, 어수선한 상황이 이어지며 불안해졌다. 마침 나는 일본 공항에서 늘 인기인 르 타오(LeTAO) 치즈케이크를 구입해 머리 위 선반에 넣어 둔 터였다. 밤에 도착한단 내 소식을 들은 친구가 퇴근하고 집에 가 차를 가져온 후, 인천 국제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친구에게 줄 깜짝 선물로 얼음을 넣어 포장한 치즈 케이크를 야심차게 준비한 거였다.
<두 개 샀어야 할, 그날의 도쿄 국제공항 치즈 케이크>
속은 타는데 비행기는 이륙하지 않고 맛있는 치즈 케이크는 녹아 흐물흐물해질 것 같아 속상해하고 있었다. 결국 몇 시간이 흐른 후 비행기는 떴고 한국에 도착했다. 트렁크를 빛의 속도로 찾아 부랴부랴 게이트로 가보니 곱게 정장을 입고 있던 우아한 직장인의 내 친구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나를 기다리며 졸고 있었다. 친구가 아니었다면 늦은 새벽 한국에 도착해 택시를 잡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덕분에 나는 무사히 편안하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곤 친구에게 연신 사과했다. “미안해, 치즈 케이크 두 판 사 왔어야 하는데~”
얼마 전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때마침 내 인스타그램을 보고 자기에게 말도 없이 제주도를 그냥 다녀 갔냐며 서운해하던 그였기에 이번에는 제주도 일정이 잡히자마자 연락하곤 약속을 잡았다. 하필 이번 내 숙소는 서귀포의 끝자락이었고 그 친구가 사는 곳은 공항 근처의 시내. 친구는 차를 1시간 운전해 와선 내가 머무는 호텔의 로비에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늦은 밤 일을 끝내고, 나와 저녁을 먹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 온 것. 함께 떠들고 웃으면서 그간의 근황을 이야기할 수 있어 행복하던 시간. 비록 같은 한국이지만 비행기를 타야 만날 수 있는 사이이니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새삼 이 얼마나 귀한 인연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릴 적 여행을 할 땐 남들 다 아는 여행지, 관광지를 하나라도 더 보는 게 중요했고, 늘 짧은 휴가를 내서 다녀야 하는 직장인 여행자였기에 내가 세운 계획에 맞춰 꼭 많은 걸 정복(?)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도 처음 내 직업을 이야기 듣는 사람들은 마치 짠 것처럼 모두 똑같이 ‘그래서 몇 개국을 다녀왔냐’고 묻는데 사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하도 많은 질문을 받다 보니 나는 엑셀로 내가 다녀온 여행지를 대륙/나라/도시명으로 구분해 적어두기 시작했다. 내가 발 디뎌본 곳의 숫자가 궁금한 거라면 차라리 도시 수로 말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해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여행지로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면 오랜만에 현지에서 볼 친구를 생각하며 마음은 더 들뜬다. 비록 서로 시간이 안 맞거나 사정상 얼굴은 못 보고 온다 치더라도, ‘이곳엔 내가 위급할 때 SOS를 요청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당신은 이런 사람을 가졌는가? 내 여행을 더욱 설레게 해 줄 여행지에서의 친구. 만약 있다면 그대는 여행을 두배로 더 즐길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없다면? 현지에 가서 사귀어 보기를! 특히 여행지에서의 친구는 혼자 갈수록 사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다른 새로운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