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여행을 했고, 책을 썼다. 그 당시 직장인의 여행 콘셉트로는 첫 책을 냈던 터라 그 반응은 몹시 뜨거웠고, 단숨에 그 해의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다. 그리곤 곧바로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책은 목차까지 내 책의 것과 그대로 따라 하는 바람에 진이 빠지기도 했었다.
이런 나는 항상 시간을 쪼개어 썼다. 회사일에 지장을 받으면 안 되니 평일이면 근무를 하고, 주말이면 다음 떠날 여행을 준비하거나, 이미 다녀온 여행에 대한 글과 사진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책을 써 나갔다. 다행히 잠이 많지 않은 편이었는 데다가, 늘 그런 생각도 했었다. “죽으면 평생 잘 거, 잠 많이 자서 뭐 해?”라는 놀라운 사고방식(어려 서부터 친구들이 연구대상이라고 하긴 했었다;;). 이런 의지와 열정을 공부에 쏟았더라면 명문대에 갔으련만! 또르르…
그렇게 늘 바쁘게 살았고, 언제나 근무시간 외에는 내 여행에 몰두했다. 성격상 한 번 한다면 해야 하고, 무언가에 빠지면 오롯이 미쳐버리는 스타일이라 오랜 시간 늘 내 인생의 최우선은 여행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렇게 살다 보니 당일 낮에 해야 할 일, 저녁에 해야 할 일을 분리했고, 주말에 할 일까지 미리 챙겼다. 다행히 어릴 적부터 메모 광이었고, 내 현실 속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해치우려면 이렇게 관리하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추석이었던 것 같다. 늘 그랬던 것처럼 명절에 떠날 궁리를 하고 있었고, 아시아에서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여행지 방콕이 슬그머니 눈에 들어왔다. 언제 가도 좋은 그곳, 언젠가 꼭 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있을 만큼, 개인적으로 몹시 애정 하는 도시다. 오래전에 몇 개월 머물다가 왔던 방콕에서의 체류 경험은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으며 돌아왔을 만큼 먹방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매력이 넘쳤다. 그러니 방콕은 언제 누구와 가도 늘 행복했다. 항공권 구매를 마치곤 우연히 방콕에 거주하는 친구와 카톡을 하게 되었다. 내가 여행하는 기간에 본인은 남편과 함께 옆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자기네 집에서 머물다 가라는 것이었다. 정말 언제 어디서나 여행복 하나는 끝내주는 나! 다시 한번 나의 운명에 감사하며, 친구네 집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여행을 떠날 때가 되자 친구가 직접 만들어 보내준 PPT 파일에는 공항에서 집을 찾아가는 방법, 동네 맛집, 추천할 만한 마사지 숍과 쇼핑 아이템 등이 깨알같이 소개되어 있었다. 어차피 관광지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럴 계획도 없었던 터라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나만을 위한’ 완벽한 방콕 생활백서였다. 이 모든 것은 똘똘한 데다가 배려심까지 넘치는 친구가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복도 많은 나!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 집에 도착해보니 식탁 위에는 나를 환영한다는 문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집 내부에 딸려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하라며 내어준 수영복, 선크림, 그리고 여행하다가 현금이 모자라면 먼저 쓰라며 준비해둔 태국 바트화가 아름답게 놓아져 있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던 순간! 나는 그날부터 친구 침대에 드러누워 늦잠을 자고,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마음껏 읽었으며, 배가 고프면 친구가 소개해준 PPT속 동네 맛집들을 하나씩 탐방하며 동네 주민들 틈에서 방콕을 즐겼다. 저렴한 길거리의 팟타이에서부터 고급스러운 매장의 호주식 커피까지 즐기며 하루하루 호사를 누렸다.
나는 왜 늘 바쁘게 앞만 보며 살았을까? 이런 여유도, 이런 즐거움도 여행에서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건데 말이다. 친구 잘 둔 덕분에 그동안 수없이 갔던 방콕 여행 중 가장 행복하고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때의 추억. 코로나가 사그라들면 나는 무조건 첫 번째로 방콕의 푼나위티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틈에 껴서 ‘현지인 사이에 슬쩍 섞인’ 이방인으로서의 여행을 다시 한번 즐기고 싶다. 제발 그날이 빨리 다시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