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카드의 힘
*커버사진 출처: pixabay
학교폭력 가해학생 조치가 내려왔다.
교내봉사활동 3시간, 특별교육 3시간.
이 세상 모든 처벌이 그렇겠다만, 피해학생이 받은 피해의 크기에 비하면 턱없이 약하다. 애초에 처벌로 피해학생의 피해가 회복된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다.
특별교육 3시간.
대충 학습지 주고 끄적이게 해도 되고
명심보감 깜지를 쓰게 해도 되고
인성교육 온라인 강의를 듣게 하고 느낀점을 쓰게 해도 된다.
편하게 하려면...
그러나 그렇게 끝내고 대충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 기회를 그냥 놓친다면, 이 아이는 또다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기에. 이 아이를 통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기에.
문득 전에 비폭력대화 연수에서 선생님들과 했던 공감활동을 이놈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고, 감정카드를 활용해 상대의 마음이 어땠을지 추측하는 간단한 활동이다. 인위적인 상황이지만, 생각보다 마음에 와닿는다!
카드를 활용해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대의 말 한마디에 왈칵 눈물을 쏟기도 했던 그런 활동이었다.
그 공감의 힘을 이놈에게도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내 감정을 온전히 공감받는 기분이 어떤지, 내 이야기를 누군가 온전히 들어줄 때 기분이 어떤지. 또는 내가 상대에게 그렇게 했을 때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공감능력 1도 없는 이 아이가 과연 얼마나 진지한 모습을 보여줄까. 사실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자, 오늘 특별교육 마지막 시간인데, 오늘은 쌤이랑 카드게임을 할 거야.”
“예.”
“서로 돌아가면서 최근 행복했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 하나씩 이야기할건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사람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 감정카드에서 5개의 감정을 골라 이유와 함께 상대방에게 건네는 거야.
카드를 받은 사람은 그중 가장 와닿는 감정카드 2-3개를 고르고 이유를 설명하면 돼. 어렵지 않지?“
“예.”
그렇게 내가 먼저 행복했던 기억을 나누었다. 나는 최근 (너를 포함한ㅋ) 말썽꾸러기들이 그래도 많이 달라져서 선생님들한테 인사도 잘하고, 예전보다 사고도 덜 치고, 공부도 나름 해 본다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 행복했었다고 이야기했다.
“자, 이제 쌤 기분이 어땠을지 이 카드 중에 골라서 주면 돼. 이유도 말해줘야 하고.“
평소 이 아이의 습관 같았으면 “몰라요.”가 전부였을 텐데, 신기하게도 감정카드를 일일이 살펴보며 신중하게 고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천천히, 이 아이는 자기가 고른 감정카드를 내밀며 이유를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놀란. 맨날 담배피고 애들 패고 사고치던 애들이 달라져서 놀랬을 거 같아서요.”
“가슴뭉클한. 저희가 선생님들한테 칭찬받을 때 마음이 그랬을 거 같아서요.“
“기쁜. 예전 학생부장들 방식 말고 다르게 한 방식이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서 기뻤을 거 같아요.“
“기대되는. 앞으로 애들이 어떻게 더 달라질 까 기대되기도 할 것 같아서요.“
“편안한. 저희가 예전보다 사고치는 게 줄어들어서 일이 좀 줄었을 거 같아서요.“
와, 정말 놀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거친 아이의 입에도 이런 공감의 언어가 담길 수 있다니. 비록 특별교육이라는 강제적인 상황에서, 감정카드라는 도구를 활용해 인위적인 공감을 하고 있지만 분명 그 아이가 한 말들은 내 마음에 한 개씩 날아와 내려앉고 있었다.
과거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 면전에도 욕을 싸지르던 아이였다. 친구를 패기도 하고 돈을 뺏기도 하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입에서 이런 소중한 말들이 나오다니.
감정카드가 제공한 단어는 앞의 형용사들 뿐이었다. 그 뒤에 덧붙여진 이유들은 다 온전히 이 아이의 마음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그래서 더 소중했고, 고마웠다.
그렇게 역할을 바꿔서 하고 난 후, 이번엔 힘들었던 일을 나누었다. 사별만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최근 내가 힘들었던 순간들은 죄다 사별과 연관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사별 이야기를 꺼내게 됐다.
너무 무거운 사건이라 들으면서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 반절과, 이 무거운 사건에 이 아이가 그저 시큰둥하게 반응한다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은데... 두려운 마음 반절. 정확히 그렇게 두 마음이었다.
뜻밖에도, 이 아이가 보인 반응은 내가 예상한 두 가지 모두 아니었다. 처음에는 약간 놀란 듯 한 눈빛이더니, 이내 내 이야기에 그냥 머물러주었다.
행복한 일을 나눌 때보다 더 오래 묵직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더욱 신중하게 카드를 골라주었다. 한 카드에서 오래 머물다가 지나치기도 하고, 꺼내다 다시 가져가기도 하고.
카드를 고르는 그 순간만큼은 이 아이의 진심이 느껴져 눈물이 왈칵 나올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외로운. 같이 있던 사람이 이제 곁에 없어서 외로우실 것 같아요.“
“걱정스러운. 하늘나라에 잘 갔나, 거기서는 잘 있나 걱정되실 것 같아요.”
“힘든. 슬픈. 사랑하던 사람이 자꾸 생각나서 힘들고 슬플 것 같아요.”
......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이 다섯 카드는 사진도 못 찍었다. 잠깐이었지만, 그 아이와 내가 온전히 이 순간에 머무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다 이 아이의 공감 덕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이놈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정말 고마웠다. 기대 이상으로 나의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고, 공감의 언어들을 입에 담아보는 시도를 해주어서. 그 순간만큼은 아낌없이 감사를 표현했다.
이 아이의 이야기에 나도 똑같이 역할을 바꾸어 온전히 공감해 주었다. 개인사가 담겼기에, 그 내용은 적지 않았지만 이 아이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공감의 언어에 함께 오래 머무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어땠냐는 질문에, 좋았고 재미있었다고 답했다. 이 아이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온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놀랍고 신기했다.
나의 목적은 이 말썽꾸러기들이 한 번이라도 이런 공감의 언어들을 입에 담아 보는 것. 그래서 그 기분을 직접 느껴보는 것. 그리고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나중에는 이런 카드가 없이도 상대방이 어떤 기분일까 자동적으로 생각해보게 되고 행동하는 그런, 공감할 줄 아는 멋진 어른이 되어있는 것.
물론 갈 길은 아직도 멀지만, 0과 1의 차이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