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공간을 돌보는 일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내 것’에 만족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간다.
내 배우자, 내 집, 학교, 내 차, 내 직장, 내 나라.
내가 가진 것, 내가 속한 공간에 만족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SNS의 영향도 크다. SNS에는 이 세상의 다양한 모습들이 시시각각 올라오는데, 이 화려한 모습들은 상대적으로 내가 가진 것들이 초라해 보이게 함으로써 그것들이 싫어지게 만들고, 더 나은 공간을 동경하게 한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해보기로 했다.
이번 휴가는 유명한 여행지나 고급 호텔을 찾아다니기보다, 집 밖에서 만족을 찾아다니기보다,
내가 속한 공간을 더 사랑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미친 짓을 해보기로 했다.
쉬는 날, 출근해 보기로.
(쓰면서도 정말 미친 짓 같다.ㅋㅋ)
매일매일 출근하기 싫어 죽겠는 마음으로
오던 이곳. 이곳을 더 사랑스러운 곳으로 만들어 볼 작정이었다.
빗자루를 들고 먼지가 뒹구는 구석구석을 쓸었다.
시든 수국과 올리브나무 이파리들이 말라비틀어져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멀티탭 위에 엉켜있는 먼지구덩이와 머리카락도 깨끗이 쓸어본다.
복사기와 파쇄기, 창틀 위의 먼지도 걸레로 한번 스윽 닦아본다.
교무실 한복판에 있어 동선을 방해하던 기다란 옷장도 낑낑대며 구석으로 옮겨놓았다. 공간이 한결 넓어졌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상쾌하다.
내 자리에 쌓여있던 문서들도 한데 모아 필요 없는 것은 파쇄하고, 나머지는 가지런히 파일에 정리하여 락카에 보관했다. 한 학기 동안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나 업무 매뉴얼은 서랍에 집어넣기로 한다.
제멋대로 나뒹굴던 포스트잇과 볼펜, 안경닦이, 가위, 칼 등도 제자리에 꽂아본다. 모니터 받침대와 키보드 사이사이, 마우스 패드 아래, 전화기 주변, 책상 위 뿌옇게 쌓인 먼지도 구석구석 닦아본다.
이런 먼지구덩이 속에서 내가 일을 했던가...
아무것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내 자리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가드니아 향수를 뿌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내가 좋아하는 포케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내렸다.
분명 같은 공간임에도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행복감이 밀려왔다.
고급 호텔에 몇십만 원 쏟지 않아도, 해외여행에 몇백만 원 쏟지 않아도,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속한 공간에서 행복을 느끼니 오히려 돈을 번 기분이었다.
기분 전환으로서의 여행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내가 가진 것과 나의 공간을 더 사랑하게 하지 못하는 여행이라면 과연 진정 의미 있는 여행일까!
잠깐 습관적으로 폰을 깨워 친구들의 카톡 프사와 인스타 스토리를 쓰윽 훑는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 고급 호텔에서 호캉스를 누리는 친구, 샤넬 백을 메고 포르쉐 앞에서 사진 찍은 친구 등.
내게 행복을 주던 것들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마음이 그새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찰나!
후다닥 휴대폰을 끄고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내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이 현실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
책은 나를 불안하게 하지도, 타인의 삶을 시기하게 하지도, 내가 속한 공간을 초라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하고, 현재 주어진 내 삶을 마음껏 편안하게 유영하게 하고, 내가 속한 공간을 사랑하게 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하는
이 공간이
오늘, 한층 더 사랑스러워졌다.
그렇게, 2학기는 내가 속한 이곳을 조금 더 사랑하기를. 그리고 이 공간에 속한 모든 사람을 조금 더 사랑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