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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레네 Aug 07. 2024

변화를 요구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그건 사랑이 아닌 거래죠

다사다난했던 한 학기를 돌아본다.

예고 없이 들이닥쳤던 수많은 학교폭력과 교권 침해, 생활지도 사안들을 다루다 보니 한 해의 반절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한 학기 내내 학생부실에 들락거렸던 아이들은 고놈이 고놈이다. 선생님께 욕하던 아이들이 친구를 패고, 담배 피우다 걸리고, 주민들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 주구장창 신고되기도 하고.


만나는 놈들을 또 만나고 또 만난다.

매년 3월마다 내가 늘 필사하는 그 문장의 주인공들.


가장 사랑이 필요한 아이는, 가장 사랑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을 요구한다.


이런 아이들의 대다수는 그들이 받은 것을, 보고 자란 것을 그대로 타인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로서 공감받고 존중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정신 나간 새끼

쓸모없는 새끼

너 같은 새끼는 필요 없어

또 너냐? 그럼 그렇지


이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늘상 듣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아이들이 매일 매 순간 경험하는 감정은 바로, 수치심.


많은 폭력 연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폭력의 원인이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받는 폭력적인 언어와 폭력적인 방식들이, 그대로 다른 아이들에게 학교폭력이라는 형태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내가 그 아이들에 대한 편견을 지우고 줄곧 존재로 대하려 노력하고, 존재로서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같다.


나라도 그들에게 존중받는 경험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고, 존중으로 돌려주었을 때, 받는 기분이 어떤지.
반 년동안 그 하나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많은 동료 교사들의 격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반대와, 나에 대한 뒷담화도 있었음을 안다.


그런다고 그 절대 악들이 변할 것 같아?

왜 학생부에서 아무것도 안 해? 징계를 해야지. 징계 누적해서 위탁 보내버려.

대화 조금 한다고, 약속 몇 개 한다고 걔네가 변할 것 같으면 모든 애들이 변하게?

걔네가 학폭 줄어든 게 약속 때문에 그런 줄 알아? 그냥 우연히 상황이 그렇게 된 거야.


그런데 실제로 이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보여준 변화는 놀라웠다.


돈을 뺐던 아이가 돈을 더이상 뺏지 않았고,

선생님께 욕하던 아이가 더이상 욕을 하지 않게 됐고,

툭하면 친구한테 패드립하고 쥐어 패던 아이가 더이상 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 탈 없이 평범하게 학교 잘 다니는 아이들에 비하면, 이런 변화는 지극히 작고 사소한 것들이기에 마치 거리의 들꽃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봐주려고, 알아차려 주려고 애쓰는 어른들에게만 보이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그러나 이들이 자라온 삶을 생각한다면 ‘절대 작지 않은’ 변화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들은 그저 선물처럼 주어진 것일 뿐. 내가 이 아이들에게 쏟았던 사랑과 눈물과 기도의 목적은 사실 이들의 변화가 아니었다. 변화를 목적으로 했다면, 진작 지쳐서 포기했을 거다.


많은 어른들이 착각한다.

사랑을 주면 변화될 것이다”라고.

물론 온전한 사랑과 희생이 곧바로 눈에 띄는 변화로 열매 맺을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은 그냥 참 감사한 선물 같은 시간들인거고.


진정한 사랑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너무 사랑해서, 아이와 늘 자기 전에 암송하는 성경 구절.

고린도전서 13장 4-7절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올해 첫 학생부장을 하며 유난히 와닿았던 구절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면서 끊임없이 내 유익을 구했던 순간들을 돌아본다.


돌아보면 아이들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하며, 나의 방식이 교사들에게 인정받길 원했고

기존의 응보적, 폭력적 방식이 완전히 잘못됐음을 어서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겉으론 사랑이란 탈을 썼지만 결국 이 마저도 왜곡되고 뒤틀린 내 자아의 인정받길 원하는 욕구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어떠한 대상에게 사랑을 쏟으며 그에 걸맞은 변화를 요구하는 것, 결국 그조차도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심인 것이다.

변화를 요구하는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나는 사랑을 줄 테니 너는 변화를 보이거라,
이건 거래가 아닐까.


사랑의 정의를 다시금 내 안에서 정리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일일이 변화시켜야 한다는 그 강박에서 자유하다.


2학기에도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긍휼을 잃지 않길. 최근 읽은 공백 작가의 <휴식의 말들>이란 책 속 한 구절처럼,


내가 가진 무수한 감정들 중 연민의 감정이
제일 덜 지치길.


유한한 내가 하는 사랑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의 사랑에 불과하기에.

2학기를 앞두고 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본다.


유일한 사랑과 긍휼의 원천이신 그분과 연결될 때만이 내 안에서 사랑과 긍휼이 메마르지 않고 샘솟을 수 있기에...


2학기에도 내가 만나는 수많은 영혼들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소서! 모든 편견을 눈에서 벗겨주시고 그들의 거친 표면이 아닌 내면의 웅크린 상처투성이 자아를 보는 영적 시야를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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