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명의 중딩에게 물었습니다
바람직한 학교문화를 위한 <학교문화 책임규약>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올해부터 필수 과제다.
교육의 3주체, 학생-교사-학부모가 바람직한 학교 문화를 만들기 위한 서로의 책임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실천을 다짐하며 약속하는 활동이다.
학생들의 책임을 작성하세요.
교사들의 책임을 작성하세요.
학부모님들의 책임을 작성하세요.
이렇게 종이 한번 쭉 돌려서 취합하면 보다 더 편하게 일을 끝낼 수 있었겠지만, 그냥 의미 없는 형식적인 활동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선생님들이 이런 걸 원하겠지.
애들이 이런 걸 원하겠지.
이렇게 추측해서 만드는 약속과 책임은 큰 효과나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진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언제 존중받는다고 느끼는가?
실제 아이들의 목소리, 교사들의 목소리를 책임규약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이 ‘귀찮은 짓’을 두 번이나 하게 됐다.
서로의 책임을 작성하기 전, 한번 더 사전 과정을 거친 것이다.
“선생님들은 언제 존중받는다고 느끼시나요?”
“학생 여러분은 언제 교사로부터/부모님으로부터 존중받는다고 느끼시나요?”
먼저 이렇게 사전 조사를 거친 뒤, 그 조사 결과를 최종 가정통신문에 실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이럴 때 존중받는다고 느낍니다. 이를 읽어보고 여러분이 지킬 수 있는 책임을 작성해 주세요. “
“우리 학교 학생들은 실제로 이럴 때 부모님께 존중받는다고 느낍니다. 읽어보시고 부모님께서 지킬 수 있는 책임을 작성해주세요.“
“우리 학교 학생들은 실제로 이럴 때 선생님께 존중받는다고 느낍니다. 읽어보시고 선생님께서 지킬 수 있는 책임을 작성해주세요.“
그렇게 교육 3주체의 책임 규약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가정통신문에 싣기 위해 아이들의 사전 조사 결과를 취합하던 중, 나는 아이들이 작성한 설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부모님께 존중받는다고 느끼는지 물었을 때, 내가 예상한 응답은 ‘용돈 많이 주실 때, 게임 실컷 하라고 해주실 때’와 같은 것들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용돈 많이 주실 때’는 약 700명의 재학생 중 단 2명, ‘게임 실컷 하게 해 주실 때’라는 응답은 0명이었다.
아이들이 부모님으로부터 진짜 원했던 것은 용돈이나 게임이 아니었다. 예상밖의 결과라 신기하기도 하고 충격이기도 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다 알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다음은 실제 중학교 1-3학년 학생들이
“언제 부모님으로부터 존중받는 느낌이 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서술식으로 응답한 내용이다.
맛있는 밥을 차려주실 때
헤어스타일을 내 맘대로 하게 해 주실 때
내 방에 들어올 때 노크해 주실 때
나에 대한 사소한 일들을 기억해 주실 때
결과보다 내가 한 노력을 알아주실 때
언니, 오빠랑 비교하지 않을 때
무조건 혼내기보다 내 말을 듣고 내 편이 되어주실 때
사랑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해주실 때
내 꿈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밀어주고 응원해 주실 때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봐주실 때
화내지 않고 다정하게 말해주실 때
잘못하고 있는 것 말고 잘하고 있는 것도 알아봐 주고 칭찬해 주실 때
가족끼리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내 의견도 물어봐주고 반영해 주실 때
나만의 시간, 장소를 배려해 주실 때 등.
특히 제일 많았던 것은, ‘맛있는 밥을 차려주실 때.‘
잘 쓰지도 못해 갈겨쓴 글씨로, 수많은 아이들이 적은 내용이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걸 원했구나. 용돈 많이 주면 좋아하고, 게임 실컷 하게 해 주면 그저 좋아하는 줄 알았던 우리 아이들이, 마음 깊은 곳에선 이런 걸 원했구나.
실제 아이들이 손으로 써낸 것을 하나하나 읽어보고 있노라니, 조금 울컥했다.
우리는 늘 우리 아이들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우리 안의 틀로 그들을 규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단편적인 존재들이 아니었다. 매일 만나야 하고 매 순간 귀를 기울이며 들여다봐야 하는, 지금 이 순간도 변하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