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씩 남편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날이 있다.
미친년처럼 괴성을 지르며 울고 또 울어도 가시지 않는 슬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리움이 나를 짓누를 때가 있다.
많은 심리학자들, 상담사들, 정신분석가들, 의사들은 슬픔이 찾아오면 많이 울고 슬퍼하라고. 다들 그런다. 그게 맞다고, 건강한 거라고.
알겠습니다, 알겠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올라오는 슬픔을 누르고 꾹 참는 것만큼이나, 그 슬픔을 충분히 느끼고 몸으로 소화해 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쏟아지는 슬픔과 우울과 분노와 불안과 자책과 그리움 같은 것들 속에... 내 몸과 마음을 얼마간 담고 있어야 하는 그 순간이, 몸서리치게 힘들고 고통스럽다.
한번 발을 담그면 그 깊이가 마치 늪 같아서... 하염없이 더 깊이, 더 깊이 끝도 없이 나를 저 아래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나는 얼마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지옥 같은 시간들을 버텨야만 한다.
충분히 슬퍼하라는 말.
충분히 슬픔을 다 토해내라는 말.
심리학적으로 그게 정답일진 몰라도,
직접 몸과 마음으로 그걸 겪어내야 하고 그 모든 과정을 버텨내야 하는 이들에겐 그 말마저도 지옥 같은 말이다.
죽음을 경험한 이들에겐 충분히 슬퍼하라는 말조차도 그래서, 잔인하다.
나의 사별 이후, 사별을 경험한 이들에게 나도 함부로 “충분히 슬퍼하라”는 말을 그래서... 절대 할 수 없었나 보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내 몸과 마음이 기억하기에.
그렇다고 뭐, 다른 대안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우리 사별자들은, 어떤 말도 힘들고 아프고...
그렇다.
만일 3년이 지나고 내가 지금보다 괜찮아진다면,
그 3년간 내가 충분히 슬퍼해서인지,
그냥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지는 건지,
지금의 나로선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찾아오는 슬픔을 누르고 참고 밀어내는 것이 올바른 애도가 아님을 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냥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다 힘들다. (어쩌라고?)
오늘은 자려고 누웠는데 계속 남편이 생각나고 보고 싶어 잠이 오지 않았다. 더 누워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서, 이 기분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어떻게 생겼었더라.
사진 속 남편의 고정된 모습 말고,
실제 걸어다니고 나에게 말을 걸고 밥을 먹고 잠을 자던 남편이 어떻게 생겼었더라.
남편은 어떻게 웃었더라.
목소리는 어땠었더라.
체온은 어느 정도였더라.
안기면 어떤 느낌이었더라.
어떤 체취가 났었더라.
살결은 어땠었더라.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갑자기 다 날아가 버린 것만 같다.
그의 존재가 있긴 했던 걸까.
빨리 잊어버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바쁜 일상에 하나둘 날려 보낸 것이,
어느 때는 다 잊혀지고 하나도 남은 것 같지 않아 오히려 더 미치게 한다.
남편은 지금 어디 있지.
이 추운데, 어디서 뭘 하고 있지.
미친년처럼 이런 생각도 했다가.
마지막 보았던 그 입관할 때의
창백한 보랏빛 얼굴이 떠올라
펑펑 울기도 했다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내 새끼를 보고
한번 더 눈물을 닦는다.
오빠, 예준이를 보니까 오빠가 이 세상에 존재하긴 했었구나.
오빠를 쏙 빼닮은 예준이.
이 아이마저 없었다면 오빠가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아마 내 삶에 가장 커다란 거짓말, 가장 커다란 농담처럼 여겨졌을 거야. 그랬다면, 지금도 슬프지만 지금보다 더 슬프고 아프고 힘들었겠지.
보고싶다. 어디서 뭐 하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