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공부하는 딸에게

들어가며

by 리라

20년이 조금 넘는 세월 동안 국어 교사로 일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국어 교사니, 딸에게 국어 하나만은 똑 부러지게 가르쳤겠지!”. 또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자기 딸을 가르칠 시간은 없어도 당연히 좋은 학원에 보낼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편견이자 고정관념이라 말하고 싶다. 그렇기에 딸이 국어 점수를 잘 받아올 리가 없다. 아니 정정하면, 내가 국어 점수를 따질 형편이 아니다. 딸은 국어뿐 아니라 모든 공부를 혼자 하고 있다.

물론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도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으니, 하나밖에 없는 친구 같은 딸에게 이런저런 하소연을 한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국어’ 과목이 언급될 수밖에 없다. 직장 생활의 핵심은 ‘국어’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배울 작품을 복사해 와서 읽으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오늘 공부 시간에 이렇게 수업했는데, 어떤 반응이 왔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우리 아이는 제법 직장 동료처럼, 아니면 학급의 학생처럼 솔직하게 반응한다. 본인도 본질적으로 외로울 것이다.

나의 딸의 바람은 남들처럼 국어 학원에 다니는 것이다. 영어, 수학 학원 다니는 것보다 국어 학원 다니는 아이들이 잘난 척을 하는 모양이다. 중학교 내신 공부는 혼자서 그럭저럭했지만 이제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모의고사를 봐야 할 텐데 하고 말이다. 딸아이가 불평하면, 난 “지금 학원 다니는 것만으로도 바쁘잖아.”하고 대꾸한다. 현재 수학과 과학 학원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앞서서 얘기했던 “국어뿐 아니라 모든 공부를 혼자 하고 있”다는 것이 거짓이라고 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앞의 말은 사실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부를 혼자 한다.

오늘 과학 학원의 담당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어제 수업했는데 아이가 표정이 어두웠다고 하셨다. 혹시 엄마에게 무슨 말은 없었는지 궁금해하시기에 내가 요즘 쓰는 ‘든든한’ 방패를 말씀드렸다. 아이가 중학교 때 미국에 가 있느라 물리를 못 배웠다고 말이다. 당연히 들은 적이 없는 개념 설명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자는 것 같더라고 말씀드렸다. 사실 먼저 자서, 아이가 뭐 하느라 늦게 잤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냥 본인이 평소 말하는 것처럼, 분명히 모르는 개념을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거라고 선생님께 전달했다. 이렇듯 그러니 학원에 다니고 있으나, 본인의 진도 및 실력은 철저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학원에 다니는 것은 철저히 아이의 판단과 선택이다. 본인이 학원을 검색하고, 테스트 날짜를 정하고, 반과 요일을 선택했다. 난 부모로서 그저 비용을 내고 있다. 그리고 소심하게 반항한다.

나도 아이가 어렸을 때는 이런저런 욕망의 화신이었다. 극에 달했을 때가 아이의 초등학교 일 학년에 맞춰서 일 년 휴직한 때였다. 마침 담임 선생님께서 내주시는 숙제도 많아 독후감, 받아쓰기, 영어 프로그램 등 다 시키고 나면 자정을 넘기곤 했다. 애당초 학원 순례를 하고 난 후, 학교 숙제를 늦게 시작했으니까. 어느 날 몇 시간밖에 못 재운 아이를 수영 대회에 보내면서 깨달았다. 나는 엄마가 아니라 마귀할멈이구나. 이 아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었구나. 그즈음 몰래 본 아이의 독후감 마지막 구절이 잊히지 않는다.



“나도 아모스가 보던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

- 딸의 독후감의 일부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골몰히 책상을 응시하면서. 물론 그 책상에는 어떤 낙서도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흩어진 지우개 가루만 점점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그 회색빛 가루로 몇 번이고 다른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오로지 그녀의 상상력만으로 지루한 공부 시간을 넘어갈 수 있었다.

모든 시간이 다르나 같았고, 움직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어떤 샘(교사)도 그녀에게 표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그냥 그냥 무난하게 흘러가는 자습서 해설처럼, 모든 시간은 기계적으로 각자의 임무를 일방적으로 수행했다.

그녀는 문득 어린 시절에 읽었던 이야기책을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아모스였고, 더 세밀하게는 아모스가 바라보던 바다였다. 아모스는 생쥐면서 거대한 바다를 사랑해서 스스로 배를 만들었다. 그리고 항해를 시작한다.

- 딸의 독후감에 영감을 받아 내가 쓴 소설의 일부



그 이후로 조금씩 조금씩 아이의 공부 영역에 대해 주변인처럼 대응하고 있다. 예전처럼 깊숙이 개입하면, 간섭하게 되고 아이를 세세하게 망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의 국어 작품 해석을 잠깐 들어보더니, 눈을 솔깃하면서 국어책을 갖고 온다. 이제부터 엄마가 학교 선생님처럼 가르쳐달라고 말이다. 협박했다. 내가 가르치는 순간, 너의 점수에 대해 집착하게 될 텐데(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이것밖에 못 해 같은) 그래도 괜찮겠는지 말이다. 아이도 생각이 있으니, 당장 말을 못 한다.

나는 국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니, 글 쓰기도 좋아하고 당연히 국어 과목도 좋아한다. 그런데 학창 시절 국어 점수가 뛰어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지극히 보통이었다. 사실 성적이 잘 나오고, 선생님의 칭찬을 듣는 건 수학 과목 덕이었다. 그래서 문과 계열을 선택할 때,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셨다. 내가 국어를 좋아하는 건, 그래서 작가를 꿈꾸는 건 모르셨을 것이다. 수학을 잘하던 내가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교사가 되겠다며 국어 교육학을 배운 건 정말 삶의 아이러니이다. 맞다. 사람은 결국 좋아하는 걸 업으로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길을 무심코 걷더라도, 결국은 돌고 돌아 자신의 길을 걷게 된다.

혼자 공부하는 딸에게 가르치고 싶은 게 있다면, 결국 ‘고기 잡는 법’이다. 딸이 귀하다고, 12첩 반상을 차려 올리겠는가. 난 딸에 비하면 늙은이일 뿐이다. 모든 면에서 한계가 명확함을 안다. 그러니 같이 바다에 나가겠다. 바다를 묵묵히 바라보겠다. 무한한 바닷속 보물에 대해 서로 상상한 것을 나눌 것이다. 모쪼록 내가 없더라도 아이가 자기 먹을거리를 향해 힘차게 항해하길 바란다. 본인이 직접 일하여 일궜으니, 그 밥상이 얼마나 귀하고 맛나겠는가. 이 책은 딸 같은 아이들, 정말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닌 학생들의 보석 같은 눈을 생각하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