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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처의 에이타 Jan 17. 2021

사랑의 스펙트럼

원문  2015-06-27  옮김 2020-01-12

※2015년 6월, LGBT성소수자 인권 및 동성애 합법화에 관련하여



고등학생 때. 그땐  국어사전에서 '사랑'을 찾으면 이성이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여자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 전엔 남녀 공학이자 합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여자 고등학교에선 과연 어떤 식으로 애정이 교환되고 향하는지 궁금했다. 지금 와서 진단해보면 여고생들의 애정은, 보통 남자 선생님들이나 인근 남자 고등학교의 지인들로 향했다. 여고 축제를 하면 인근의 남자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구경했다. 내 친구 놈도 내 여고의 동아리 부스에 찾아와 케이크를 주고 갔었다. 그래서 어련히 그게 남녀고, 애정이자 우정이고 사랑이라 생각했다.


'과연 여성이 여성을 향해 애정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나의 여고 친구들은 거리낌 없이 안아주고 팔짱을 끼고 손을 잡아줬다. 몹시 어색했다. 사실 난 나의 친형제와도 그렇게 잘 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사내아이처럼 자란 영향인지. 형제와 다투고 어머니가 '둘이 안아줘, 다음부턴 안 그럴게, 미안해, 하면서 안아줘'라고 화해를 요구했을 때 먼저 팔을 벌리는 건 내가 아니었다. 



 생소했다. 다 같이 카메라 프레임 안에 들어오려고 볼을 비비거나, 재잘거리고 깔깔거리고 함께 화장실을 간다던지, 거울을 같이 바라보면서 누가 더 깨끗이 양치를 하는지 내기도 하고, 서로 살찐다고 걱정하고 놀리면서도 같이 왼갖 군것질을 하고, 야간 자율학습을 도망가서 불꽃놀이를 하며 키득대는 일도, 체육복이나 교복, 여성용품이나 화장품 따위를 빌려주는 일도, 빵 하나를 서로 돌려가며 한 입 씩 나눠먹는 일도, 물이 흥건한 손으로 엉덩이를 때려 교복 치마에 물자국을 내는 장난들 - 그런 '여자끼리의 즐거움'이 난 너무나 생소했다.


 수험생 때 나는 나를 학대하면서 공부를 이어갔기 때문에 - 후유증이 매우 크지만- 감정 기복도 컸거니와 항상 고민과 망상에 찌들어있었다. 사람이 간절하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었다. 쉬는 시간마다 나는 나에게 위로를 주는 친구들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친구의 반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얼굴을 보고 껴안고 손을 흔들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그때 문득, 어쩌면 여성인 내가 여성을 좋아하고 있는 것, 혹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들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땐 난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세계는 모두 대립쌍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 세계였기 때문이다. 


  역사 선생님이 '스펙트럼'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 나의 고민은 해결됐다. 이성애자가 양성애자나 동성애자보다 수가 좀 더 많을 뿐이고, 그게 좀 더 앞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 맞는 것으로 보이는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도수분포표 같은 봉긋한 곡선을 칠판에 그리고, 선생님이 말했다. 개인의 마음도 그렇다고. 나는 이성애자다, 양성애자다, 동성애자다,라고 선언하기까지엔 수없이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 당신의 마음속엔 이 모든 감정들이 각각의 비율과 함량으로 들어있다고. 언제나 늘 동성을 사랑하던 사람도, 어느 매력적인 이성 앞에 이성애를 느낄 수도 있고 - 어떤 계기로 양성애에 눈을 뜰 수도 있다. 감정의 함량은 항상 변한다. 스펙트럼에서 어떤 색이 더 파장을 길게 차지하는지 - 혹은 사운드 디자인에서 EQ를 만지듯이 - 어느 날엔 어떤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도 하는 것처럼. 


 난 모든 사랑의 방향을 다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여고에 다니면서, 두근거림을 느끼며 난 내 안에 '동성의 사랑'도 존재한다는 걸 인정했다.  다만 나는 이성애의 함량이 좀 더 높은 그래프를 그릴뿐이다. 향후 대학을 다니며 다양한 애정의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을 몇 번 만났다. 그들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에 걸맞은 이름을 붙이자, 세계에 질서가 생겼다. 


  아마 공자의 글로 기억한다. 대학 강의실 칠판에 또박또박 적힌 이 구절. 그리고 교수님은 사랑을 강의했다.


 사실 사랑(Love, Ai, Amour 등...)이라는 단어는 그 어느 세계의 언어권에서도 - 언어학적으로도 그 정의가 명백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사랑' 안에는 수천만 가지의 인간 양태가 존재하지만, 우린 그걸 애써 분류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죽음과 비극이다. 서로 미워하면서도 없으면 안 되는 애증의 관계, 칼 끝에 선 듯 아슬아슬한 긴장, 혹은 불꽃같은 정열, 아니면 봄바람처럼 참새의 입맞춤처럼 지나가버리는 꿈같은 것... 사랑이란 뭐라 정리해서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어떤 언어도 사랑의 여러 가지를 따로 갈래를 나눠 명명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사물에 관한 것이든, 동물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인간 단위 간 발생하는 것이든 - 그 감정, 그 개념을 분류해서 명명하려는 시도가 없다.


  무질서를 찬미하라면, 언어학이 아직까지도 분류하지 않은 '사랑'을 예로 들 것이다. 그 속에 애써 규칙을 만드려고 했던 것부터가 억지였던 건 아닐까. 이성애와 동성애의 선을 긋고 어느 한쪽을 극도로 학대해왔던 시간들을 생각해본다. 무질서로 더욱 가치를 획득하는 관념을, 굳이 애써 가르고 나누려는 건 칼로 물을 버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랑의 스펙트럼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인간이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게 되었음을 선언한 날. 


어느 이득이나 권위에 의해 자행되었던 사유의 학살이 중지되었음을 선언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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