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 끝내 고독해질 수 없다
"사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이에요"
사서 교육원의 어느 수업 시간에, 한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일은 단순히 책만 다루는 일이 아니라 정보를 다루는 일이기에,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닌 끊임없이 세상이나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일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이 말은 많은 학생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별 발표를 해야 한다는 전제로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조별 발표?
나는 이미 인생이 조별 발표 그 자체인데 무슨 조별 발표를 또 하냐며 투덜댔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취미 활동과 봉사활동서도 끊임없이 협업의 과정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어디에서나 누군가는 하기 싫은 일을 떠맡아야 하고, 서로 책임을 미루며 눈치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덤으로 사람에게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곧 몹시 분주해졌다.
모두가 하고 싶어 하지 않은 발표를 마지못해 여러 차례 맡기도 했고,
어쩐 일인지 어느새 한 조의 리더가 되어(?) 조별 과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아 하기도 했다.
조별활동에서 화가 나는 건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언제나 화가 나는 것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의 무례와 같은 것.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은 조원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역할을 맡겼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하지 않아 밤을 새우며 내가 다시 해야 했을 때 끝끝내 상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상황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모든 일이 그동안 그 사람에게 무임승차를 허용한 나의 탓일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음으로 이모티콘 없이 냉정한 말투로 과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전했지만, 상대는 오히려 내 말투가 기분 나쁘다며 지적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기분 나쁨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은 더욱 기가 막혔다.
참아야만 할까?
항상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려던 나에게도 참을 수 없는 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나는 조목조목 그 사람에게 말을 했다. 처음부터 내 말투가 그러했는지를 되물었다. 당신은 자신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노라고. 나중에 주어진 역할을 못했을 때도 사과를 하거나 도움을 구했으면 얼마든지 이해했을 거라고. 소통이 안된 점을 탓하고 있지만 소통은 어디까지나 양방향이 아니냐고.
이 일을 겪으며 문득 이전의 일이 떠올랐다.
휴직을 앞두고 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한 선배가 나를 안아주며 했던 말이다.
"나는 OO 씨가 자신만의 선이 있어서 그 점이 참 좋다고 생각해." 라고.
그 말의 의미를 한참 동안 되새겨 보았다.
추측하건대 그것은 아마 내가 민원인들의 무례에 대해 마냥 참지만은 않고, 그들의 떼쓰기에도 원칙을 넘어선 일은 허용하지 않는 것을 좋게 봤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랬다.
직장 생활을 하며, 타인과의 대화가 벽에 막힌 듯이 답답했던 때가 더러 있었다.
이해받지 못할 언어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이해받고 싶던 그 언어들을 끝끝내 삼켜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때로는 상대편을 달래기 위한 공허한 대화를 모래성처럼 쌓고 뒤돌아서면 강한 무력감이 밀려들어오곤 했다.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기계적으로 차가운 친절함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마저도 도저히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한 민원인은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묻는 말에, 그렇다 아니다 로만 답하세요.'라고.
그 순간 나는 그 무례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잠시 뒤, 나는 약간은 발끈한 채로, 그러나 여전히 기계적인 친절함을 가지고 차분하게 당신의 말에 나의 감정이 상했음을 표현하고 질문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는 답변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대편은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뭐라고 중얼거리고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뚝.
그 민원인은 늘 그런 식이었으므로,
그 사람을 상대할 때면 가끔씩 ‘악의’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그 뒤로도 사람들은 자주 내게 다가와 부딪쳤다. 정도가 각양각색인 세상의 악의들을 경험하다 보면 가끔은 모든 게 진저리가 나 직장이나 모든 인간관계를 내려놓고 어디 가서 고독하게 살아볼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고는 했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직업을 가지면 어떨까? 실제로 종종 내게 찾아오는 민원인들은 사람을 만나기 싫어서 개발자와 같이 컴퓨터를 다루는 직업으로 직업을 전환하려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사람을 상대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직업이 몇이냐 있겠냐마는, 상대적으로 사람과의 부침을 덜 겪는 일을 하고 싶은 그 마음을 나는 안다.
아니, 나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일까?
누구와도 화목하게 소통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지향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상대편과 제대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되,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면 일정 선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커뮤니케이션이요, 갈등 관리이다.
쓸데없이 많은 것을 이해해보려 하고, 부질 없이 다정함을 발휘하려 하며, 사회에 선의와 정의가 남아있길 바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들은 때로 나 자신의 영혼을 좀먹게 만들었다. 그렇게 무르게 살면 언젠가 물러 터지고야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또한 때때로 어두운 하늘을 떠도는 까마귀처럼 나를 맴돌았다.
그러므로 그 '악의'에 대해 내가 반박했던 그 순간들을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세상에 대한 사랑을 지킬 수 없다면 나 자신이라도 지켜야 했기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내려놔야 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 자체를 없애는 게 나를 지키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서교육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독을 갈망하게 되었다.
오히려 고독해진다면 그거야말로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새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반가움에 인사를 건네고, 몇 번 함께 밥을 먹고, 과제와 관련해 서로 묻고 답하며, 공부를 하는 고단함을 함께 투덜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함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할 때는 이전 세계의 힘듦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으며, 그리고 그것이 나의 세계를 지키게 해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풍랑 없는 삶은 아무것도 품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워지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곳으로 떠나 누군가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아마도 나는,
결코 고독해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