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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Apr 03. 2021

저기 죽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만난 사람도 있을까?

"저기 죽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만난 사람도 있을까?"

이탈리아에서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급격히 늘었다는 뉴스를 보고 엄마가 한 말이다. 이탈리아에서 몇 년 살다가 온 것도 아니고, 고작 9박 10일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엄마가 뱉은 말이었다.     


엄마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빚진 보람이 있네...’하고.  



                                      

내가 어렸을 때, 일면식도 없는 먼 나라 사람을 걱정할 여유가 엄마에겐 없었다.

주인집에서 전셋값을 올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엄마의 상은 좁았다.

거들먹거리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던 엄마는,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 밑에서 아니꼬운 일들을 참아가며 버텼다. 자식들 교육비 내는 날을 하루도 어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식들 교육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때까지 엄마는 날을 세운  화를 안고 살았다.


그런 엄마 덕분에, 장학금도  타고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했던 내가 대학을 졸업했다. 심지어 대학원까지 기웃거렸다.

서른이 넘어서야 밥벌이 싶은 딸이,  모을 생각은  하고 틈만 나면 유럽행 비행기에 올라타 엄마는 잔소리를 하지 .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 유럽여행을 선물하겠다는 소망을 품고 살았다.

 "내가 너 학비 대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소리 안 하시고 "쟤가 시험공부하지 않고 진작 여행을 많이 다녔으면 좀 더 행복했으려나?"하시는 부모님께 전하고 싶었다.

두 분이 고생해서 가르쳐 주신 덕분에 내가 문학도, 그림도, 여행도 즐기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노라고...


그러다가 2018년 가을.

조금 많이 걸었다 싶으면 다리와 허리가 아프다며 부쩍 할아버지 태를 내기 시작하는 아빠를 보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2년이나 남은 엄마의 칠순 선물을 미리 챙기자고 동생에게 얘기했다. 그동안 냈던 보험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싫다고 펄쩍 뛰는 부모님 말을 무시하고, 동생과 반씩 분담해서 제법 비용이 나가는 패키지 상품을 예약했다.    

 

여행을 다녀온 부모님은

“쟤가 안 우겼으면, 우리 평생에 유럽은 생각도 못 해. 코로나 때문에 이제 언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시간 더 지나고 그때처럼 걸으라면 못 할걸? 지금 생각해도 다녀온 게 꿈만 같아.” 하고 종종 말하신다.

TV를 보면서도 콜로세움, 알프스 산자락, 모나리자, 에펠탑이 나오면 ‘우리 갔던 곳’이라며 눈을 크게 뜨신다.


예수쟁이를 못마땅해하던 엄마는 바티칸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온 후, 미사 시간에 늑장 부리는 나를 재촉한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봉헌금을 내주기도 한다.   

조상님보다 하느님아버지 먼저 찾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던 아빠는 연말 수상소감에서 하느님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먼저 올리는 연예인을 보고도 이제 더 이상 잔소리하지 않는다.


월급쟁이 빠듯한 살림에 아직도 찔끔찔끔 빚을 갚고 있지만,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저기 죽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만난 사람도 있을까?"

일면식 없는 먼 타국 사람을 걱정할 만큼 엄마의 세상이 넓어진 게 반가웠다.

근심걱정 하나 없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노년을 보내는 것도 아니건만...

당장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발 뻗고 누울 작은 집 한 칸이 있으니까 엄마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아직 빚이 남아 있지만, 코로나 이후에도 감사하게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던 나는 당분간 세금을 조금 더 내도 불평하지 않을 작정이다.

예전의 엄마처럼, 벼랑끝에 내몰린 것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을 누군가에게 내가 낸 세금이 재난지원금이 되어 조금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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