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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By 은정이 . Nov 03. 2016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는다면(2)

우리는 무엇을 추억할 수 있을까?

지갑을 열고 생각없이 쑤셔넣은 영수증들을 빼냈다. 지난 6개월 가량의 궤적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달려나왔다. 딱히 챙겨둬야 할 영수증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며 찢었다. 뭘 그리 많이 먹고 돌아다녔는지 치킨, 햄버거, 냉면, 스파게티, 자장면 등 한식, 중식, 양식 종류를 가리지 않는 음식점 영수증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시는 갈 일이 없을 것 같은 닭발집에서 받은 쿠폰, 세 개밖에 찍히지 않은 커피숍 쿠폰, 언제 챙겨 넣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명함들을 버리는데, 명함들 사이에서 언뜻 손글씨가 눈에 띄었다. 디자인만 보고는 '옷가게에서 받은 건가?' 생각하며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음식점에서 받은 명함이었다.



2번의 두 숙녀분에게
일요일 점심 로로 찾아주셔 감사합니다 :)
비가 내리기 시작했네요. 내일 아침까지 비가 온다니 조심하시고 다음 주도 화이팅!!
                                                                                                                                            - 주인장 -


'주인장'의 편지가 순간적으로 나를 보슬보슬 봄비 내리는 홍대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5월의 어느 일요일... 후배를 만나 수제맥주집을 찾아 나선 길... 갑자기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주위를 둘러보곤 괜찮겠다 싶어 들어갔던 음식점... 

파스타였던가? 그날 먹었던 음식의 종류도 맛도 딱히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분위기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넓지 않은 공간에 다섯 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었다. 열어 놓은 문을 통해 들어오던 채광과 소리들은 조금 어둑한 실내를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 주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주방에서 조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친구가 해주는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으면서는 주로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작년 여름, "20일 동안? 굳이 독일만?"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여행을 하고 온 후배였다. 

후배는 9월에 출발하는 독일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둔 내게 2권의 책을 건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독일만 20일 여행하다 보니 나중에는 약간 지루한 느낌도 없진 않았는데요, 편하고 조용한 독일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더라고요. 왜 다른 나라 관광도시들 가면 그런 거 많잖아요? 어디에 가면 반드시 뭐를 보고, 뭐를 먹고, 뭐는 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하는 숙제 같아서 괜히 사람 조급하게 만드는 것들이요 하하. 그런데 독일은 그런 게 많지 않아서 여유 있고 좋았어요. 

저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서 거뭇거뭇한 독일의 오래된 건물들이 특히 좋아요. '헤르만 헤세'의 고향인 '칼프' 가는 길에 봤던 사과나무는 또 어찌나 예쁘던지... '베를린'의 '브란덴브르크 문' 위로 붉은 노을이 지는 걸 볼 때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지더라니까요?"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계산을 했었다. 주인장이 건네는 명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지갑에 넣었나보다. 주인장의 마음이 5개월 만에 뜻밖의 선물로 내게 전달되었다.  


다음에 후배를 만날 때는 이 명함을 챙겨가야겠다. 

종종 "언니, 연남동에서 베트남 쌀국수 먹는 거 괜찮아요?", "강남역에서 타이음식 먹었는데 괜찮더라고요.", "언니, 'SOMEDAY FESTIVAL'티켓이 있는데 한강에서 음악 들으며 맥주 한잔 같이 해요."하며 연락을 해주는 고마운 후배에게, 음식보다 주인장의 마음이 더 맛있는 그곳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예쁜 후배에게도 봄비 내리던 행복한 5월의 추억을 선물로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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