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뜻을 이제야 알겠어...
죽음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삶의 의미를 끌어내는 너의 답장을 읽은 후, 두 달 전에 다녀온 독일의 '다하우(=다카우) 수용소'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계속 생각났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3년 동안 수감되었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의 책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어.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며 네가 건넨 그 책을 지난주에 읽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어본 건, 초등학교 때였어.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접하는 가스실, 생체실험, 학대, 굶주림 등의 이야기는 어렴풋해서 더 공포스러웠던 것 같아. 지금도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이 부족한 나는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저 막연한 공포심이 먼저 든다.
그러면서도 강제수용소에 한 번은 가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절로 튀어나오는 "어떻게 인간이..."라는 말속에, '인간 존재의 불가해함'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거든. 수용소에 다녀오면 '인간 존재의 불가해함을 조금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거든.
수용소 중에서 네게 가장 익숙한 곳은 어디니? 나에겐 '아우슈비츠'였어. 언젠가는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일행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수용소에 들를 계획이 없었어.
그런데 독일에 도착한 첫날, 뮌헨의 중심 광장에서 버스킹 공연을 즐기는 독일 사람들을 지켜보며 수용소에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보다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과 현장 분위기가 더 흥미로웠거든.
다른 곳이었다면 박수치고 환호하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췄을 것 같은데, 흥겨운 노래를 들으면서도 고개만 조금씩 까딱거리는 덩치 큰 독일인들이 다소 귀여워서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어. 그리고 그 웃음을 따라 이런저런 생각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지.
'이들은 좌로 15도, 우로 15도 까딱하는 고개의 움직만으로도 이렇게나 흥겨운 마음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건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이후, 집단주의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을 극도로 경계하는 독일에서는 사람들이 감정을 축구장에서나 분출한다던데, 이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봐야 하나? 독일인들은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존경받지만, 전범국가의 시민으로서 마음 한켠에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나? 그래서 감정을 억누르고, 즐거운 감정을 맘껏 분출하지 않는 무뚝뚝한 독일인이 되었나? 그렇다면 이들은 태생적으로 집단적 트라우마를 경험하며 사는 거 아닌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잘못된 인과관계의 오류, 논리적 비약 등의 용어로 비판받아 마땅할지도 모를 생각을 하며, 그 자리에서 마음먹었다.
'내일은 근처에 있는 다하우 수용소에 가 보리라.'
일요일 아침, 뮌헨 중심가에서 16km가량 떨어진 다하우 수용소를 찾았어.
참혹하고, 음습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상상했던 나는 사실 좀 당황했어. 수용소가 너무나 평화롭게 느껴졌거든.
나는 역사관 건물에 들어가서, 최초의 나치 강제 수용소로써 다른 강제 수용소들의 모델이 되었다는 다하우 수용소에 대한 정보를 조금 얻었다. 짐짓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셀카를 찍고, 가로수길 끝에 있는 가톨릭 추모 공간에서 기도했다. 모든 희생자들이 종교를 초월해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해 달라고. 햇볕이 드는 화장터와 가스실은 내 상상 속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져서 비현실감마저 들게 만들더라.
독일인들을 조금 이해해 보겠다며 야심 차게 방문했던 다하우 수용소였다. 그러나 나는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쉽게 볼 수 있는 사진들만 핸드폰에 잔뜩 담아 돌아왔다.
그런데 지난주에 책을 읽는 동안, 수박 겉핥기 식으로 구경했던 공간들이 내 맘속에서 비로소 제 의미를 찾았다.
내가 봤던 텅 빈 공간에 구체적인 이야기들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들어앉았거든.
방금 숨을 거둬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시신 곁에 다가서서 그가 먹다 남긴 감자를 낚아채야 했던 삶의 이야기, 두 시간 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시체가 되어 동태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도 무감각하게 수프를 먹어야 했던 삶의 이야기 말이야.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킬 정도로 간절했던, 집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죽었는지도 모를 아내의 24번째 생일날, 흐느끼듯 토해내는 애끓는 바이올린 선율을 듣고 떨군 눈물방울.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의 감정이 내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어.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비누 한 조각을 받아들고 목욕탕이라고 쓰여진 곳에 들어가 독가스를 마시고 죽은 사람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거부하며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누워 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왔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만약 책에서처럼 수용소에 가게 된다면...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곳'에 들어가기 전에,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 전에,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상황'에 처하기 전에, 가스실에서 가장 빨리 죽음을 맞이하는 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거라고.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끔찍했으니까.
그런데 보름아, 나 며칠 전에 정말 죽을 뻔했다.
파란불에 느긋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우회전을 하는 차가 속도도 줄이지 않고 바로 코앞에서 '쌩'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죽을 뻔했어. 내가 한 걸음만 더 내디뎠다면,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만한 속도였어.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휴우' 내쉬는 안도의 한숨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묻어나서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어. 그러고 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프랭클 박사님은 수용소에서 빼앗긴 원고를 다시 집필하겠다는 삶의 의미를 찾고, 그 끔찍한 곳에서 살아남으신 분이다. 우리가 어찌 그분이 하는 말에 토를 달 수 있겠니?
박사님같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기 전에 죽여 달라는 기도를 올리겠다던 내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참 무겁고 벅찼다. 때로는 구조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박사님의 말들이 멀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횡단보도에서 나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그 자체의 존엄'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박사님의 말을 희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가 만약 수용소에 간다면 가장 처음으로 죽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련다. 대신, 다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역사가 우리에게 되풀이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련다. 우리 모두가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서 보다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련다.
그런 의미에서 보름아 우리, 지금 켠 촛불을 영원히 끄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