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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May 28. 2017

튀빙겐의 횔더린 탑을   마주한 날

커다란 테라스가 딸린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무더운 여름날 오후를 보낼 수 있는 도시. 재스민과 라일락 향기가 실린 따뜻하고 상쾌한 바람이 부는 도시. 시민들의 이야기 소리와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한 도시. 거리 이름에 횔더린, 실러, 헤겔, 헤세처럼 풍요로운 유산을 남긴 사람들의 흔적이 있는 도시. 많은 오페라 하우스와 극장, 훌륭한 박물관이 있는 도시. 호엔촐레른 같은 성들, 검은 숲과 보덴 호수, 수도원과 바로크 양식 교회들에 둘러싸인 도시.



소설 『동급생』에서 슈투트가르트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한 도시였다.


웃음소리, 꽃향기, 오페라 하우스,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며 중앙역에 내려선 나는 '어? 이게 아닌데?'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사가 한창인 중앙역 주변에는 기중기들이 삐죽삐죽 들어서 있었고, 비가 약간 내리는 4월 하순의 추위는 패딩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둘둘 만 여행객을 거지꼴로 만들었다. 뮌헨의 옥토버페스트 같은 맥주 축제가 열리는 시기라나? 도시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여행객에게 쉴 곳을 내어주지 않았다. 2시간 정도를 헤매 찾은 단 하나의 15만원짜리 호텔방은 비싼 가격보다도 흡연실이라는 게 문제였다. 라일락 향기를 상상하며 간 도시였다. 이 도시의 첫밤을 담배냄새에 찌든 쾨쾨한 호텔방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발길을 돌려 튀빙겐으로 향하는 기차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독일에서 손꼽히는 대학도시로 산등성이에 위치한 구시가지에서 조용히 흐르는 강과 낡은 건물들을 만나보기만 해도 편안해진다는 여행 책자의 문구만큼은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튀빙겐에 도착했을 때는 밤11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조그마한 기차역 주변에는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사람들도, 이제 막 낯선 도시에 도착한 여행객을 위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적지를 향해 떠난 후, 인적 드문 거리에서 숙소를 찾아 헤매던 나의 캐리어 바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던 건, 조금의 외로움에 약간의 두려움이 더해졌기 때문일 거다.


실제로는 돌돌돌 거렸을 캐리어 바퀴 소리를 덜덜덜 들으며 10분 정도 정처 없이 걸었더니, 숙소가 보였다. 싸지는 않지만 저녁에 느꼈던 실망, 당황, 긴장의 감정을 말끔히 털어버릴 수 있을 만큼 깨끗하고 안락한 숙소에서 하룻밤 자고 길을 나섰더니, 슈투트가르트(튀빙겐)가 그제야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산책로에서는 새가 지저귀고, 슈토허칸(나룻배)이 정박해 있는 네카어 강 옆에는 뾰족 지붕을 머리에 인 파스텔 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 횔더린이 36년간 살았던 집을 사람들은 횔더린 탑이라 불렀다. 건물에서 둥그렇게 튀어나온 부분이 마치 강 위에 떠 있는 탑 같아서 그렇단다.



1770년에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난 횔더린은 튀빙겐대학 신학과에 들어갔지만, 신학 공부 보다는 철학과 시를 쓰는 데 더 열중했다. 졸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가 된 횔더린은 그 집 부인인 주제테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지만, 만난 지 3년 만에 그녀와 이별하고 함부르크, 고향, 슈투트가르트 등지를 방랑했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횔더린은 1806년부터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36년간 튀빙겐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았다.(두산백과 참고)


생애 단 한권의 시집도 출간하지 못한 시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했다. 살아생전 세상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긴 세월 자신을 보호해 줄 누군가가 곁에 있던 이 시인은 행복한 사람일까? 불행한 사람일까?   

   

내가 살아온 인생만큼을 미치광이로 보낸 시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철딱서니 없는 생각도 해봤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라면 나도 머리 풀고 백치처럼 한 몇 년 살아보고 싶다고.


그런데 미치광이는 아무나 되나? 그저 세상살이에 지쳐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오면, 다시 이곳에 돌아와 탑을 마주하고 서서 36년을 폐인으로 보냈다는 사나이의 삶을 떠올려 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소설 『동급생』 한 쪽을 펼쳐 읽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횔더린-히페리온,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그의 생에서 36년을 신들에 의해 휴거되어 정신을 잃은 상태로 보낸 튀빙겐이 있었다. 횔더린의 집, 그의 온화한 감옥이었던 탑을 내려다보며 우리는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곤 했다.     

노란 배들이 매달리고 / 들장미 가득 심긴 / 땅이 호수에 비치니. / 너희 고귀한 백조들은 / 키스로 물을 마시며 / 신성하고 냉철한 물 속에 / 네 머리를 담그누나. //     

아아, 나는 어디에서 이 겨울에 / 꽃들을 찾을 수 있을 거나 / 또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는 /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거나. / 깃발들이 덜컹거리는 / 바람 속에서 벽들은 / 말 없이 차갑게 서 있는데. //
( 횔더린, 「반평생」 )     

                                                                                                    - 프레드 울만, 『동급생』, 58~59쪽.
매거진의 이전글 두 번째 고해의 날, 얀 네포무츠키 성인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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