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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Nov 05. 2017

또 몇 년이 흐른 후, 이날처럼 문득

2년 전, 커피를 배우러 다녔다.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며 가까스로 1년을 버틴 후, 5년간 하던 일을 그만둔 때였다.

아무 계 없이 일을 그만둔 후, 실업 급여를 받아 커피를 배웠다. '취업이 안 되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나이 많고 아르바이트 경 없는 직원을 사장님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 배우기 시작한 커피 수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생두가 원두가 되고 커피가 되어 입 안에 흘러들기까지... 햇빛, 온도, 습도 등 수많은 요인들이 맛과 향의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게 신기했다. 커피 한잔 내리는 과정을 예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때로는 생두를 찾아 남미의 안데스 산맥을 누볐고, 때로는 몇백 년 역사를 가진 유럽의 어느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렸다.


목구멍에 풀칠을 할 요량으로 배우기 시작한 커피 수업은 마음속에 막연한 꿈들을 부풀려 놓았고, 나는 유럽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겠다며 집에서 두 시간 떨어진 곳까지 커피를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그때 함께 커피를 배우던 동기가 2명 있었다. 한 명은 천안의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듣기 위해 서울로 왔다. 다른 한 명은 남편과 함께 성북동에서 카페 창업을 준비 중이었다.

열 번이 채 안 되는 만남 후,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두 사람은 그저 내 카카오톡에 '커피 동지'와 '커피 성북동'으로 남아있었다.


그래도 가끔 프로필 사진을 통해 두 사람의 근황을 확인할 때면, 역시 천안 게 맛있다며 '커피 동지'가 건네던 호두과자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멀리서 수업 들으러 오는 동기들에게 굳이 자신의 가게에 들러 달라는 부담은 주기 싫다던 '커피 성북동'의 말도 잊히지 않았다. 빈말이 오고 가는 건 원치 않는다던 동기의 쿨한 진심이 2년이 지나도록 마음속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편이 원래 더치커피에 관심이 많았어요. 인터넷 판매도 하니, 혹시 기억나시면 인터넷 사이트에나 한번 들러주세요."

하는 '커피 성북동'의 말에

"예. 사이트에 방문해서 커피맛 꼭 볼게요."

하던 나의 대답은 그야말로 빈말이 되어 2년이 지났다.


빈말이 오고 가는 건 원치 않는다던 동기의 쿨한 진심과 빈말이 되어버린 나의 대답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나는 동기의 성북동 카페를 찾아갔다.

'나를 알아보긴 할까?', '내 동기는 없고 그녀의 남편만 가게를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에 들어섰더니 주인장은 없고, 단체 손님이 다녀갔는지 빈 컵들만 수북이 쌓여있었다. 한집 건너 한집씩 커피숍이 생겨나고, 또 그만큼 많은 커피숍들이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한 채 폐업의 길을 걷는 전쟁터에서 2년을 버텨낸 동기다. 그녀를 버티게 해 준 빈 컵들이 반가우면서도 고단함까지 고스란히 전하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괜스레 찡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카페를 둘러봤다.

카운터 맞은편 책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얼마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안톤 체호프의 책들이었다. 떼돈 버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자기개발서 대신 문학책이나 소로의 월든이 꽂혀 있는 책장에, 나를 이곳으로 이끈 동기의 쿨한 진심이 꽂혀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10분가량 지났을까? 내 걱정과 달리 동기가 들어서며

"어! 어떻게 왔어요? 멀리서..."

하고 말을 건넸다.


"저 기억나요? 2년 전 카페 준비할 때... 멀리 사는 사람들한테 부담 주는 것도 미안하고, 서로 빈말 주고받는 것도 싫어서 카페에 한번 들러 달라는 말을 안 하던 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서 꼭 찾아보고 싶었어요."

하는 내 말에


"워낙 머니까 그랬죠."

동기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는 그때 커피 배우고 나서 한 번도 에스프레소 내려본 적이 없어요. 요새 커피숍 운영하는 게 쉽지 않다던데, 힘들겠지만 2년 지나도록 이렇게 자리 잡고 커피 내리는 모습이 참 좋네요."

하고 말하니


"예. 쉽진 않아요. 여기도 커피숍 점점 많아지고, 2년간 신랑이랑 번갈아 쉬면서 휴가 한번 제대로 못 가졌어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커피가 재미있다며 환하게 웃던 동기의 커피는 역시 맛있었다.

온몸으로 커피콩과 씨름했을 그녀가 건네는 커피에서는, 몇 마디 주워듣고 머릿속에서만 그려내던 커피 맛이 났다.



"평일에는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는데... 주말이라 손님들이 계속 찾으시네요."

하는 그녀와는 몇 마디 나누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쿨한 진심을 전하는 주인장이 맛있게 내리는 커피를 마시러 들어오는 손님들이 반갑고 좋았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손님들이 계속 있으니 더 좋다고 말한 후, 편하게 책을 좀 읽다가 나왔다.


 

굳이 큰길까지 따라 다서는 나의 커피 동기와 인사를 나누며 생각했다.

저마다 소소한 사연을 품고 있을 이런 작은 커피숍들이 많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고. 적어도 터무니없이 높은 가겟세 때문에 문을 닫고 쫓겨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언제 또 이곳을 찾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소망한다. 지금부터 또 몇 년이 흐른 후, 이날처럼 문득 이곳을 찾아가 주인장과 몇 마디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동급생』을 읽고 독일 서남부 지역이 너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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