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슬픈 엔딩을 써. 그건 곧 내가 삶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든 결국 슬픔으로 돌아오는 끝이 내게 맞다고 여겨서 그런가 싶어. 유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현은 유연의 웃는 얼굴을 본 순간,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유연에게 와닿기보다 그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유연이 기쁨으로 웃는 순간의 일상을 살길 바랐다. 현은 유연이 쓰던 글을 떠올리며 말했다.
“너가 썼던 ‘무용의 일’에서 희서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사회운동가 활동을 한다고 잠을 줄여가면서 일하고 자신이 손해보는 희생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어. 수없는 사람들에게 왜 사건이 개인의 잘못이 아닌지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부당하게 기능하고 있었는지 어떤 배제와 빈틈이 발생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
희서는 부지런히 인과 관계를 찾는 일에 전문가였고 그 일에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희서는 자신의 우울감을 당연하게 느끼며 내 아픔은 나의 탓이 아닐지 하는 의심을 관두기 어려웠고 그는 그 생각을 매일 했기에 오히려 그 아픔을 더 말하기 힘들어했어. 그럼에도 희서는 인간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어릴 때부터 그는 평생 곁에 남는 상처를 자문하고 현재까지도 종종 그 생각을 했지만 희서는 자신이 살고 싶은 이유는 곁에 있는 여자들 때문이라는 확신이 있었어.
희서의 확신을 재판하기라도 하듯 자신에게 중요했던 여자들 대다수 어느새 희서로부터 멀어졌지만 희서는 자신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던 여자들을 기억했어. 희미한 기억들을 매일매일 돌려봤지. 나는 예전에 반짝였던 관계가 기억나면 그 관계를 계속 해서 잊고 싶었어. 이제 그렇게 삶을 설레게 했던 여자들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거 같아서. 결말을 예상해도 상관없거나 안 좋은 쪽으로 나를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 나를 통과하고 내 감정이 왜 싫은지 계속 해서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런 나와 다르게 희서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이 주었던 시간을 믿으면서 삶을 살아가잖아. 난 그 시간을 의심하면서 살아가겠지만 그 시간조차 미워하겠지만 그래도 희서는 그 시간을 자기혐오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쓴다는 걸 보고 기이하게도 반대로 내가 그 시간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쓰지 않고 그 시간을 영영 잊는다 해도 그 시간이 덜 무섭게 느껴졌어.
좋은 사람이 올 거야. 이 시기도 지나가. 그런 말들은 내게 효력을 주지 않아. 나는 이 시기를 보내는 사람보다는 감당하는 사람에 가까우니까. 힘을 빼고 살라는 사람은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사용되지 않는 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기쁨 없는 삶에도 슬프기보다 무뎌지는 것 같았어. 차라리 기쁨만큼 슬픔도 큰 것보다 기쁨이 없고 슬픔도 크지 않은 게 더 내게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
그렇지만 너를 포함해 좋았지만 멀어졌던 관계들을 전부 잊는 선택은 못해. 설령 그때가 돌아오지 않으니 지나간 관계가 떠오를 때 머릿속에서 자주 치우는 게 고되고 나는 그 관계들 때문에 취약해졌다고 하더라도. “무용의 일”은 희서가 속했던 여성연대가 재정 문제와 인력난으로 없어지고 희서의 자세한 감정과 그 이후의 일상은 예고되지 않은 채 희서는 바람이 피부에 닿는 것을 감각하면서 물에 잠기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고 끝이 나지.
그러나 나는 결국 희서의 간절함은 오히려 일상을 사는데 무용했고 몇 년이 지나도 진실로 기능해도 기억이 그대로 남지 않더라도 희서는 의식하지 않고 그때를 받아들일 거 같다고 믿고 싶었어. 어떤 무의식은 가끔 이유 없이 내 일상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는 시기와 닮았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우리가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받아들여지고 살고 싶은 마음에 대한 의심과 이해를 끌어안는 일이 아닐까?“
“넌 오래 헤어졌다가 만나도 여전히 한결같은 데가 투명하다. 내가 예전부터 네 천성을 잘 알아봤다는 증명처럼.“
유연과 현은 조용히 서로의 곁을 지켰고 그날의 둘은 단잠을 잤다. 꿈을 꾸지 않아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