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에 빠진 말리피센트

by 권은지


엄마의 전화기 속 내 이름은 ‘우리집 기둥’이다. 일찍이 솔로가 된 엄마는 혈혈단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동시에 나의 기둥 라이프도 막이 올랐다.


엄마는 늘 새벽 3시쯤 들어왔고, 나는 잠을 이겨내며 엄마를 맞이했다. 잠든 아이들이 깰까 봐 조심스레 문을 열던 엄마가 나를 발견하고 입모양으로 안 잤니? 하면 엄마의 무사귀환을 확인한 나는 대답 대신 곧장 베개에 기댔다. 피곤한 몸은 빠르게 씻곤 나와 동생을 좌우에 끼고 가운데에 누웠는데, 바깥바람을 맞아 차가운 살결이지만 늘 포근했다.


이미 감긴 눈꺼풀로 섬집 아기처럼 엄마를 기다리다 잠든 동생에게 엄마는 매일 밤 주문을 걸었다. 누나를 엄마라고 생각해. 단 열 자밖에 안 되는 주문은 몽롱하게 잠든 동생뿐 아니라 가까스로 잠이 든 나에게도 먹혀들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속 말리피센트도 오로라에게만 마법을 걸었는데 엄마는 동시에 나와 동생에게 마법을 부렸으니 대단한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애 둘을 홀로 키워야 하는 마법사와 이제 갓 중딩이 된 어린 기둥은 아등바등 고군분투했지만, 철 지난 드라마에 나오는 가난 클리셰를 피하지는 못했다. 대체로 자존심을 박박 긁어 고개를 숙이는 일들이라 자연스레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이 많았다. 미안해요. 다음 번에 해결할게요. 이번만 봐줘요. 사정이 여의치 않아요. 따위에 말로 고개 숙일 일만 있던 엄마에게 나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엄마가 만든 치렁치렁한 미사여구로 단장한 나는 저보다 동생을 먼저 챙기는 착한 누나로, 학교에서 얻은 문제집만 풀어 엄마의 학창 시절 그녀가 가장 좋아한 국어 선생과 같은 대학에 간 기특한 딸로, 대학 앞 조그만 원룸에서 기거할 때도 도움을 받지 않는 성실한 대학생으로, 졸업 후 서울에 취업을 한 사회 초년생으로, 일찍 결혼해 자리를 잡아 그녀의 생일 땐 어머니 사랑합니다란 리본이 달린 꽃바구니를 배달하는 사위를 데려온 효녀가 되어 엄마의 서러움을 날려주는 든든한 기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엄마의 눈에 나는 착실히 세계를 넓혀가는 사람이었고 그 과정이 꽤 순탄하게 보였나 보다. 엄마는 그녀의 로망처럼 사는 나라는 피조물을 항상 자랑하고 싶어 했지만, 어느새 엄마의 키를 넘어선 나는 하루를 숙제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터라 엄마의 사소한 감탄에 일일이 반응해 줄 수 힘조차 없이 지쳐 있었고 늦은 새벽 몽롱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오로라는 왕자의 키스로 깨어난 순간을 기억할까? 말리피센트보다 강력했던 엄마의 마법이 풀리던 순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선명한 것은 교복을 벗으면서 마법은 사라졌다는 사실이고, 내가 아는 것이 엄마가 아는 것보다 많아졌을 때 기둥은 더 이상 굳건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하는 똑 부러지는 딸이 이룬 결과를 사랑했고 그녀의 마법서에 보란듯이 담겼는데 내가 겪은 시행착오는 누구나 겪는 힘든 일이라는 이유로 과감히 편집됐다. 나를 좋게 포장하는 능력을 타고난 엄마와 과대 포장 속 실속 없는 내용물인 된 나와의 간극은 조금씩 깊어졌다.


엄마와 나의 거리감은 엄마의 생신날 선명히 드러났다. 나는 꽃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당시 유행이던 생화 케이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픽업이 가능한 엄마의 집 근처 핸드메이드 케이크 가게에 모조리 전화를 돌렸다. 한 군데에서 겨우 만들어주겠단 회신을 받았고 엄마가 좋아하던 꽃을 골라 신중하게 주문했다. 일요일 아침 빠르게 픽업해 온 케이크로 생일파티를 마치고 생크림이 변질될 수 있으니 빨리 드시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전달하고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도 이런저런 평이 없길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그 생화가 시들 때까지 케이크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까워서 건들지도 못하고 생화가 마를 때까지 바라봤다는데 말문이 막혔다. 엄마 그냥 케이크잖아. 왜 먹지도 않고 보기만 했어. 핀잔 섞인 말에 엄마는 기가 죽어 대답했다. 예뻐서. 그 말에 잠깐 숨을 멈췄던 것 같다.


엄마에게 내 말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였는데 통신법은 그중 하나였다. “회사에 있을 땐 전화 받으러 나가면 눈치 보이니까 전화 걸지 마” 5분 거리에 사는 이모가 유난 떤다고 내게 면박을 줄 때도 엄마는 언니가 서울 직장 생활에 대해 뭘 아냐며 내 기를 살려주었다. 엄마는 내가 정한 통신법을 성실히 따르는 사람이었다. 전화는 거의 없고 카톡으로 “딸~ 바빠?”하며 사이버 노크를 거쳐 용건만 간단히를 실천했으니까.


어김없는 어느 날이었다. 한참이나 쌓인 일에 깊은 한숨을 뱉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상사한테 뒤지게 깨져서 눈썹을 들썩거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겉으론 테이크아웃 해온 커피에 얼음을 으그덕 씹으며 속으론 회사를 생각하며 입술 끝에 욕지거리를 매달고 있었다. 여기까진 분명 평범한 날이었다. 그때 진동음 울리고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른 시간부터 울릴 일이 없는 내 핸드폰이었다. 누구지?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의자 뒤에 매달아둔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이모였다.


이모가,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했다. 하나의 문장이 완성되자 별안간 사이렌이 울렸다. 지독히 평범하고 참으로 낯선 문장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기에, 엄마가 내 말을 얼마나 숭배하는지 알기에, 이모가 남몰래 나에게 전화할 일은 제로, 아니 마이너스에 가까웠다. 본능이 내게 속삭였다. 받지 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입안 물컹한 볼을 깨물며 전화를 들었다. 이모, 무슨 일이야. 침착한 목소리의 이모가 읊조리듯 대답했다. 은지야, 엄마가 암이래. 순간, 입 안엔 비릿한 피가 맴돌고 아슬아슬하게 맴돌던 욕지거리는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바람이 꽃을 시샘해 매서운 추위를 만드는 것처럼, 불행도 행복을 시샘해 추위를 만드나싶다. 뭐가 이렇게 어렵냐. 살만하니 이런 일이 생긴다는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와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가만히 앉아서 울고 있을 순 없었다. 곧장 엄마가 있는 본가로 향했고, 가는 길 내내 엄마의 병과 관련된 병원을 수소문해 예약해 5대 병원 중 한 군데에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대형 병원은 분주하고 바쁜 곳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웃거나 울며 다양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가 환자이고 보호자인지 단번에 구분이 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개 입원 안내문 따위를 들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바쁘게 걷고 있는 앞장선 사람이 보호자고 환자는 보호자를 잃어버릴까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가기 바쁘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누가 봐도 씩씩한 내가 보호자,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 엄마는 환자. 이제 나의 마법사는 내가 외우는 주문에 맞춰 이리저리 움직였다.


수술은 제법 빠르게 진행됐고 순조로웠다. 다인실이 아닌 2인실을 사용하던 엄마는 옆에 환자와 금세 친해졌는데 거기서도 잘난 효녀가 병원부터 수술까지 싹 다 알아봤으며 엄마가 불편할까 봐 곧 죽어도 2인실을 고집했다며 과장 섞인 칭찬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엄마는 옆 환자가 3번 바뀔 때까지 퇴원하지 못했는데, 혈액종양내과로 전과 직전이 돼서야 퇴원 허락이 떨어졌다. 대장부가 복귀한다는 소식에 온동네가 들썩였고 우리는 그날 이른 축포를 터트렸다.


며칠 뒤 첫 항암을 가는 차 안에서 엄마가 말했다. “이 고생을 했는데 살아야지. 꼭 살 거야.” 나는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다인실에서 짐을 풀던 손길은 가벼웠다. 퍼즐이 딱딱 맞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당시 신약으로 급부상한 가장 비싼 약으로 항암을 시작하기로 했다. 엄마가 우연히 들었던 암보험이 있어서 비용 걱정 없이 치료 할 수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수술도 잘 끝났고, 예후가 좋은 항암제니 당연히 엄마에게도 잘 맞을 것이었다. 우리는 시행착오를 항상 편집했으니, 과정만 버텨 내서 먼 미래엔 웃고 떠들기만 하면 됐다. 당연히 엄마는 나을 테니까. 나에겐 자랑스러운 딸이 될 일만 남아있었다.


“보호자님, 잠시 뵐 수 있을까요?”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병실 밖으로 불려 간 나는 평이한 목소리의 교수와 짧은 면담을 마치고 비상구로 달려가 얼마간을 내리 울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석 달에 걸친 몇 차례 항암을 마치곤 엄마는 침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됐고, 그즈음 나는 아무 데서나 울고 쉽게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르는 의사 앞에서도 처음 본 간호사 앞에서도 한 달을, 보름을, 일주일을, 하루를, 엄마 남은 시간을 병원이 재단할 수 있지 않냐며 애원했다. 물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힘 없이 침대에 누워있던 엄마가 손을 휘저어 나를 밀어냈는 날만 이어졌다. 우리 모녀를 위해 엄마 친구들과 내 친구들이 차례로 방문해 형형색색 예쁜 꽃다발을 한 아름씩 엄마 품에 안겨줬다. 엄마는 아주 오랜만에 웃었고 분명히 예쁘다 말했다.


그로부터 딱 하루 뒤 엄마는 수많은 꽃을 받게 됐는데 그것들은 색이 빠진 흰 국화들이었고 투병 4개월 만에 말리피센트였던 엄마는 오로라가 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날 붙들고 많은 사람들이 울었지만 나에겐 다른 이의 눈물까지 받아줄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난 대꾸 대신 그냥 더 크게 울어버렸는데 그제서야 사람들은 나를 불쌍하게 여기며 나를 내버려뒀다.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길 바라며 계속해서 소리내어 크게 울었다.


사람들은 엄마가 영원히 잠 든 이유에 셀 수 없이 많은 가설을 세웠고, 그 가설들로 창을 벼려 나는 나를 찔렀다. 하늘을 원망할 필요도 없이 다 내 잘못이었다. 병원을 예약한, 절제 수술을 선택한, 컨디션이 돌아오기도 전에 항암을 선택한,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내 오만함이 만든 결과였으니 벌도 내가 받아야 마땅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허무와 자책을 운명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당시 내 뱃속엔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생기면 엄마가 생의 의지를 갖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에 찾아와 준 고마운 아이였는데 상복을 벗자마자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아이를 꼭 낳아야 할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자, 옆에 있던 남편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남편의 눈빛이 내 심장에 꽂혔다. 아직까지 그보다 선명한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다. 방금까지 상복을 입고 인명은 재천임을 몸소 느꼈음에도 다시 생사를 주무르겠단 건방진 생각을 했단 사실이 한심스러웠다. 엄마도 아이도 고마움 투성이인데, 못난 나는 왜 그들을 다 짐으로 여긴 걸까.


그제서야 투병하던 엄마에게 사랑을 고했던 일이 있나 되새겼다. 먹어야 낫지, 운동해야 낫지, 이렇게 하면 낫지, 그렇게 읊조리는 내 주문에 엄마는 어릴 적 나처럼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줄 알았는데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형용할 수 없는 후회와 동시에 세상엔 노력해서 안 되는 일도 있고 헤어짐은 반드시 온단 이치를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돌아가신 엄마를 미련 없이 보내기를 결심했다. 여러 번 되새겨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삼켜내겠다는 의지로, 그렇게 해야지만 엄마가 떠났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례가 끝나고 얼마간 나만 보면 울던 어른들이 꽤 많았는데 나는 그들에게 우리 각자의 아픔은 각자가 감내하기로 해요. 슬픔을 나눈다는 명목으로 서로에게 아픔을 떠넘기지 말도록 해요. 하며 선을 그었다.


동생도, 남편도, 이모도, 사촌언니도 엄마를 사랑한 만큼 슬퍼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각자의 슬픔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내 슬픔만큼은 오로지 내가 책임져야 한다. 좋은 결과가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으로 꿈꾸던 미래가 무너진 순간 찾아온 허무한 감정을 인정하고, 나만의 속도로 가능한 만큼 인정하는 과정을 거쳐 내게 일어난 사실을 용납해야 했다.


때때론 승복할 수 없는 상황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건 잘못해서 생긴 일도 아니고, 우연히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출구 없는 괴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인정하는 과정으로 나라는 사람을 단련시켜 두면 다시 큰일이 닥쳤을 때 담담히 받아드릴 수 있지 않겠나. 이제 와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진정한 사랑을 알려주고 떠난 나의 오로라 공주는 별빛당이란 건물에 잠들어 있다. 엄마와 이별 여행에서 봤던 강원도 둔내의 별빛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엄마 저거 봐 별이 많아 나가보자. 나의 작은 독려에 엄마는 얇은 담요를 두르고 나와 하늘을 올려다 봤다. 에이 저게 뭐가 많아 하고 나를 타박하긴 했으면서도 코가 시큰거리는 추위 속에서도 우리는 한참 별을 바라봤다.


엄마의 저주를 풀어줄 거라 믿었던 나의 아이는 이제 유리 속 넘어 그녀에게 평온을 묻는다. 또 만나요 하고 손을 흔드는 아이 뒤에서 함께 손을 흔든다. 또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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