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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Aug 10. 2022

공부도 재미가 있어야지!

엄마도 힘껏 너랑 같이 재미있어볼게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현진이가 천재인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현진이는 대부분의 발달이 또래보다 월등히 빨랐다. 세 살 후반부터 한글을 조금씩 읽기 시작하더니, 네 살부터 한글을 썼고 그 해 겨울부터는 아예 혼자 책을 만들며 놀았다. 숫자 감각은 더 남달랐다. 숫자를 읽고 쓰는 것쯤은 세 살에 진작 할 줄 알았고, 네 살부터는 간단한 연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현진이가 평범한 나의 유전자를 전혀 물려받지 않은 천재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자중하려 몹시 애를 썼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내 아들은 천재입니다'를 신나게 외쳐댔었다.


그 시절 나의 흥분해 날뛰던 내 마음을 남편이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현진이가 다섯 살이 되자마자 영재 검사부터 예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이 나를 잡아주길, 내 마음이 남편의 말에 가라앉길 참 다행이다. 일곱 살이 된 현진이는 여전히 또래보다 발달도 빠르고 학습 진도도 빠른 편이다. 다만 빠를 뿐, '내 아들은 역시 천재야'라는 내 마음속 외침은 고요해진 지 오래다.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영어 과외를 하고 외국엘 다니며 영어를 모국어만큼 잘하는 아이들이 정말 많아졌다. 안일했던 나는 하루 30분씩 하는 현진이 유치원 영어수업에만 오직 의존했는데, 일곱 살이 되고 보니 그러면 안 되는 거였구나 싶었다. 현진이는 똑똑하니까, 뭘 가르쳐도 금방 배우니까, 영어도 똑같겠지, 그런 마음과 함께 엄마표 영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귀찮음으로 현진이를 마냥 믿고만 있었다. 선생님은 현진이가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고 늘 말씀해주셨지만,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현진이 주위엔 영어를 아주 잘하는 친구들이 태반이었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늘 월등하다는 칭찬만 들어오던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지 오래라, '잘하는 편'이라는 말이 영 성에 차지 않았다. 나중에 현진이가 영어에 발목 잡혀 힘들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어, 나는 뭐라도 하기 시작했다.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니 재미없어하진 않을까 하는 내 걱정과 달리 현진이는 넘버블럭스를 시작으로 블리피, 파자마 삼총사로 이어지는 모든 영어 동영상을 푹 빠져 봤다. 가사랑 대사는 도대체 어떻게 외웠는지 종종 역할극을 하며 놀 때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영어 말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알고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듣고 말하는 걸 재미있어했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영상 말고는 도대체 어떻게 영어공부를 시켜야 하는지 7년간을 영어에 손 놓고 있던 나는 도무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당근 마켓에서 구매한 'Elephant and piggie' 시리즈를 아이가 깔깔대며 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한글책도 그렇게까지 박장대소한 적이 몇 번 없는데 영어책에 이렇게 열광하다니. 물론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하며 읽어준 게 꽤나 결정적이어서 엄마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이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지만, 그래도 좋았다. 일단 아이가 진심으로 재미있어했으니까.


그래, 재미지! 재미가 있어야지! 다른 과목에 비해 늦은 것 같으니 얼른 영어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조급함에 쫓겨 종종 대고만 있던 내가, 현진이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영어 또한 펜을 들고 공부해야 할 때가 올 것이고, 공부란 힘들고 지루한 것이라는 걸 느낄 때가 오겠지만, 그래도 시작은 재미여야 한다. 현진이는 아직 어린이고, 어린이는 세상이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로 가득 하단 걸 알아가는 시기여야 한다. 그러니까 영어도 노는 것처럼 재미있어야 한다.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공부'라는 단어에 압도된 내 마음이 놓쳤을 뿐. 나의 조급함에 쫓겨 잊고 있었던 것을, 현진이는 기특하게도 재미를 찾아내 함께 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베스트 3'안에 순식간에 자리한 'Elephant and piggie' 시리즈는 혼자 연기를 하고 깔깔 웃어대며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있다. '파자마 삼총사' 시리즈는 놀랍게도 '포켓몬스터'마저 이겨버렸고, 현진이는 매일 꼬박꼬박 'PJ MASK!'를 외쳐가며 텔레비전을 보고 역할극을 하며 노는 중이다. 할머니네 집에 온 오늘도 보물처럼 챙겨 온 'Elephant and piggie'책 몇 권을 자랑스럽게 할머니 앞에서 읽어 보였다. 할머니 손을 꼭 잡고 20분간이나 영어로 된 파자마 삼총사 만화를 보는 바람에, 할머니는 20분간 못 알아듣는 말에 타이밍 맞춰 웃어줘야 했다. 꼬부랑 말은 모른단 할머니에게 강요하듯 현진이의 최애들이 역시 최고로 웃기다는 대답을 받아낸 게 그렇게 뿌듯해 보였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한글이 그랬고, 수학이 그랬고, 온갖 미술과 과학실험이 그랬던 것처럼, 나만 귀찮아하지 않고 현진이만 재미있어한다면 될 일이다. 어느 순간 나만 학습에 몰두해 현진이의 재미를 뺏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현진이는 영어에 자신감이 좀 생겼는지, 얼마 전부터 하루에 5분씩 영어로만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굳이 길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현진이는 잘 걸어가고 있다. 나만 중심을 잘 잡고 같이 재미있어만 해준다면, 현진이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신나고 재미있게 많은 것들을 배우며 잘해나갈 수 있다. 나만, 나만 잘하면 된다. 내일도 현진이와 영어만화를 보며 같이 웃어주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현진이가 읽어달라는 책들을 연기하듯 읽어주고, 말도 안 되는 영어로 5분 동안 신나게 같이 떠들어줘야겠다.


Jinny! I',m ready! Come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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