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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Aug 22. 2022

시골 사는 우리 할아버지는요

아빠는, 할아버지는, 우리의 자랑이에요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나는 창피한 것이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 아빠는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는 일이 창피했고, 아빠의 새까만 얼굴과 종종 나오는 험한 말투가 창피했고, 주말마다 놀러 가는 대신 농사일에 바쁜 부모님을 따라 시골 할머니 집에만 가야 하는 게 창피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잠 좀 더자고 편히 학교 가라고 아빠가 차로 등교를 시켜주셨는데, 피곤이 극에 달한 고등학생에게 자차 등교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음에도 소똥 묻은 아빠의 트럭이 창피한 마음에 늘 마음은 불편했다.

나는 부끄럽지 않아도 될 것들에 매번 부끄러워한, 창피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어른이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름휴가로 시골 부모님 댁엘 가기 며칠 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갈비뼈가 부러져서 움직이기가 힘들다고. 아이들에게 미리 당부를 해둬서 할아버지에게 함부로 매달리거나 놀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딱히 기대하지 않고 갔다. 그냥 우리끼리 마당에 프라이빗 수영장이나 설치해 놀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 댁엘 갔다.


그런데, 특별한 이벤트 없이 지나갈 거라 여겼던 이번 여름휴가의 서프라이즈는 의외로 아빠 몫이었다. 할아버지의 미안함이었는지, 시골 토박이로서의 의무감이었는지, 배에 복대를 두르고 트럭을 탈탈 끌고 나가 동네 구석구석을 돌다 결국 아이들이 놀기 딱 좋은 높이의 냇가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집념의 할아버지 덕분에 아이들은 사흘이나 사람 없는 냇가에서 아주 프라이빗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친절하고 살가운 사람은 아니지만 자식이 해달라는 걸 해주려고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 뭘 배우고 싶다고 하면 딱히 재밌는지 잘하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빠듯한 살림에도 거절 한 번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철마다 제일 빨리 먹을 수 있게 가져다줬다. 아침마다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딸을 위해 고등학교 3년 내내 빨리 준비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면서도 시골 가는 방향과 반대편인 딸의 학교로 차를 몰았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늘 그래 왔다. 비뼈가 부러진 채 대를 차고 아이들이 놀 냇가를 찾아내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된 우리 아빠는 손주들에게 아주 끔뻑 죽는다. 특유의 거친 말투는 그대로지만, 오랜 세월 아빠를 겪어온 내가 보기엔 천사가 따로 없다. 우리 아이들도 할아버지라면 끔뻑 죽는 건 마찬가지다. 할아버지가 하는 일(소밥을 주거나 트랙터를 모는 일)은 기어이 같이 해봐야 하고, 커다란 소를 붙잡고 주사를 놓는 모습을 감탄사를 연발해가면서 본다. 할아버지 트럭을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일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내가 창피해하던 아빠의 일을 아이들은 너무도 좋아해 주고, 내가 그렇게 타기를 주저하던 소똥 냄새 풍기는 트럭은 아이들의 최애가 되었다.

그게 뭐라고, 소가 어때서, 자가용만 차고 트럭은 차도 아닌가. 아이들만도 못한 내 어린 시절의 옹졸한 마음이 다시 한번 부끄러웠다.




우리 부모님이 시골에 살며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 일은 이젠 나의 아주 큰 자랑거리이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코로나를 지나오며 더 큰 자랑이 되었다. 아이들도 시골을 다녀올 때마다 유치원엘 가서 자랑을 해대는 모양이다. 소밥도 줘보고 할아버지 트럭도 타고 농사일도 도와줘봤다고. 시골일을 하는 당사자가 아빠가 아닌 할아버지이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어렸던 나보다 낫다. 움츠러들지 않아도 될 것에 움츠러들고, 고마워야 할 것에 창피했던 나의 어린 시절보다 내 어린아이들이 백 배는 낫다.


아빠가 오래도록 소도 때려잡을 만큼 건강해서, 우리 아이들의 영웅과도 같은 존재로 오래 남아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소 트럭을 실컷 타고, 농촌 체험하듯 농사일도 가끔 재미 삼아 도와주고, 소똥 냄새나는 마당에서 실컷 물놀이를 하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시골집과 우리 아빠가 오래오래 나와 우리 아이들의 자랑거리가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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