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뉘였 뉘였 하다. 한강 강줄기가 끝나는 지점까지, 또는 그보다 멀리 길게 뻗은 4차선 도로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해가 숨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더 붉고 강렬하게 마지막 순간을 불사르며 몸을 태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6시다. 그래서인지 기운이 없다. 어제보다 더 많이 움직이지도,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오늘도 피곤하다. 나는 저 해처럼 마지막이 아쉬워 쥐어짜 낼 의욕은 없다. 옆 팀 JIN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메신저가 온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일까, 잠시 궁금하다가도 어떤 말일지 짐작이 된다. 혼자 걷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히 둘러댈 핑계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지도 못한다. 몇 년 전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체력이 따라주지 못해도 같이 하려고 애를 썼다. 외지살이 대한 외로움이 커서, 나보다 남에게 친절했다. 내가 그들에게 주는 웃음의 양만큼 돌려받고 싶었다. 8년이 지난 지금, 그런 것들이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늦은 오후가 아쉬워 온몸을 불사르며 버텨봤자 해는 결국에 밤 아래로 떨어진다. 매일 열 시간이 넘는 어둠을 견뎌내야 또다시 떠오를 수 있다. 영원한 낮은 없다. 어김없이 밤은 온다. 그리고 적막한 어둠 속에서 혼자가 된다.
아주 오랜만에 엘리를 만났다. 엘리를 처음 알았을 때, 나는 그녀가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엘리의 첫 모습은 내가 원하던 이상적인 인간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밝고, 에너지가 넘쳤다. 그런 자신감속에서 가짜가 아닌 진짜 배려가 무엇인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에 쉽게 새길 수 없는 매력을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래서 다가갈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흔치 않았다. 친구가 된 엘리는 역시나 좋은 사람이었다. 둘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편한 관계가 되어도 엘리는 변하지 않았다. 기분에 따라 말투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이유 없이 먼저 연락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흔치 않다. 그런 그녀와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그녀를 대하는 내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았다. 엘리가 좋아하는 것들, 엘리의 입에서 나오는 그녀의 생각들이 진부하다고 느껴졌다. 엘리 역시 약간은 이기적이고 지루한,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탄산이 모두 빠져버린 미지근한 콜라를 마신 것 같았다.
그녀를 여전히 좋아하긴 해서일까, 이런 내 마음이 엘리에게 미안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환하게 웃으며 배웅을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한동안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런 마음이 오래가지 않기를 바란다. 엘리는 변한 것이 없다. 내가 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뒤틀리고 있거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람에 대한 환멸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같았다. 회사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그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들의 대화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 직장인의 미래, 회사나 상사에 대한 흉이 대부분이었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친구나 가족 이야기가 몇 줄 더 나오기도 한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에 나는 지루해진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듣던 말을 또 듣고, 더 이상 반복할 말도 없어지면 피곤하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들을 한숨처럼 내뱉는다. 점점 우리는 서로에게 질려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상대에게 잠깐의 환기조차 되지 못하는 관계를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마저 놓아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적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다.
원인은 결국 나에게 있다. 오만이다. 내가 모든 관계에 회의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타인에 대한 무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5분, 10분 지각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의 무능과 실수는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지만 타인에게는 매정한 사람들, 이 사람들과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나는 눈으로 그들을 동정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엘리에게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더 이상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그녀가 이질적이었다. 나이가 들어서겠지만 너무 쉽게 많은 대화를 잊어버리고, 나보다 더 잘 알던 것들도 이제는 무관심한 그녀를 보며 실망을 한다. 일주일에 고작 한 두 번 전화를 하면서, 엄마에게 잔소리만 늘어놓는 내 모습이 그들을 생각하는 나의 진실된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결국에 나를 향한 오만이다. 그래서 너는 얼마나 잘났는지, 너는 남들과 뭐가 그렇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나 역시 그들만큼이나 이중적이고 나태하다. 어쩌면 더 형편없을지도 모른다.
해가 떨어진 밤은 무척이나 어둡다, 소란스럽던 낮은 지고, 적막한 밤의 시간이다. 창밖에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 막 태어난 초승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냐고, 왜 그렇게 생각이 많고, 뭐 때문에 슬퍼하는지 까닭을 묻는다. 어둡고 황량한 골목길을 부처의 미소처럼 엷은 빛으로 비춘다. 따스하지만 날카로운 달의 물음에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떨군다. 달빛이 드리우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 한 켠을 찾아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빛도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다. 시린 바람을 맞으며 쓸쓸히 떠도는 몇몇의 영혼도 그곳에는 없다. 내 눈동자로 들어온 적막은 이내 내 방안에 가득하다. 어둠과 적막의 시작이 저곳인지, 이곳인지 알 수 없어진다. 해가 뜨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해가 뜨고 낮이 되면 마음이 나아질까, 차라리 밤이 더 편해서, 해가 뜨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