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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버들 Apr 14. 2022

사과는 빵처럼 부풀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다. 늦가을부터 봄 지금까지.

한때는 입속으로 파이 속으로 음료 속으로 갈아 사라진 덩어리가 내 눈앞에 몇 달째 버티고 있다. 말라서 썩어서 없어질 줄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든 것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내 눈앞에 자리한 사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에 몰입하기 위해, 하나의 사과의 생에 대해, 사과의 속성을 알고자 내 눈앞에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또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과는 네 조각 또는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게 사과 입장에서도 내 입장에서도 더 좋았는지 모른다. 사과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것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나 또한 계속해서 지켜봐야 한다는 의무감 같지 않은 마음으로, 지나가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사과나무에 탱탱하고 사과임을 알 수 있는 붉은 계통의 여러 빛깔을 뒤덮고 있는 사과. 사과에 코를 대면 달콤한 사과의 향기가 난다. 사과는 꼭지 부분보다 배꼽 부분에서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열매는 꼭 작은 생명체가 몸을 말고 있는 듯하다.     


꽃이 진 배꼽에 코를 대며 진한 사과의 향기를 맡는다. 먹을까 생각하지만 지켜보기로 했다.  한 달, 두 달 변하지 않고 계속 사과임을 증명했다. 한겨울이 끝나갈 때쯤 붉은 사과는 수분이 사라지는지 조금씩 주름이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과는 주름과 함께 모양의 변화도 오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빠져나간 자리에 연한 살구색과 다양한 갈색의 사과는 아직은 사과. 사실 색이 달라진다고 해서 사과가 사과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겉모습만 변할 뿐.      


사과의 모습에서 사람의 얼굴을 읽는다. 어린 사과는 붉지 않지만 풋풋함과 싱그러움을 가진 아이를, 한창 무르익은 붉은 사과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여러 곳으로 활력 있게 움직이는 젊은이들을, 그리고 그 시절이 사라지고 이렇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중년의 얼굴을 본다.      


봄이 되었다. 사과는 매일 낮과 밤을 느낄 수 있는 창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쪽 지방에서는 매화가 아름답게 피어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꽃들이 피면서 새로운 생명체들도 분주하다.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열매를 준비하기 위해 꽃은 바람에 흔들린다. 꽃향기를 품어대며 꿀벌들을 불러낸다. 꿀벌들이 윙윙 날아드는 시간에 여기 사과는 이제 노년의 얼굴을 가진 사과가 되었다. 주름이 전체를 감싸고 있다. 색으로는 이제 사과임을 증명할 수 없다. 나 또한 젊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노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올 것이다. 조금은 슬픔을 맛볼 것이다. 젊지 않다는 자신을 보면서,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이기에 받아들이며 그 나름의 시간을 지낼 것이다. 한때의 풋풋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사과도 여기까지 온 시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겠지. 사과만 갖고 있는 시간과 기억이 있을 것이다.  


봄이 깊어가고 있다. 벚꽃이  떨어지고 있다. 며칠 사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사과. 


내 앞에 쪼글쪼글한 사과는 없고 탱탱한 사과 하나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탱탱하다기보다 빵처럼 부풀어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톡! 하고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다. 처음 봤다. 시간이 지나면 수분이 날아가서 쪼글쪼글하고 썩어 문드러질 줄 알았던 지금까지의 정보에 오류가 생겼다. 물질의 화학작용에 대해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모습을 180° 바꾸다니. 죽기 전에 사과임을 증명하고 싶어 온몸에 에너지를 발산하는 느낌이다. 나는 사과입니다.      


살짝 건드렸다. 끈끈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한때의 달콤한 육즙이.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서서히 사과의 표면에 끈끈한 물방울이 맺혔다. 설마 눈물은 아닐 것이다. 사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달째 마주하던 사과를 조심히 들어 방향을 틀었다. 뒤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뒷면에 새겨진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하트 모양. 심장을 가리키는 얼룩이 새겨져 있다. 전에 없던 무늬. 심장 밖으로 뻗어 나가는 과즙의 방울들.       

   


 

나는 기억해요

낮과 밤의 시간을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아직 가슴이 뛰고 있어요

그 시간은 소멸한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나의 가슴에 남아 있어요


사과는 빵처럼 한 번 더 부풀어 오른다

한번 더 사과임을 

나는 사과입니다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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