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다’, 내가 가지고 있던 기억과 몸 그리고 나와 상관있는 어떤 무언과의 관계가 떨어져 날아가는 것이다. 잃었기에 상실감을 느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누구는 그것을 되찾고 싶어 하기도 하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것을 잊었다면 행위의 주체가 선택적으로 하지 않았다 해도 주체의 영향력을 가진다.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이 있다. 나와 상관없이 불가항력적으로 기억이 잊히고 있다면. 그 선택 자체를 하지도 못하고 잊히고 있다면 어떨까.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6년을 계셨다. 치매와 또 다른 병을 앓고 계셨다. 자식은 많았지만 집에서 모시기란 쉽지 않았다. 6년이란 시간 동안 아버지의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치매는 뇌의 질환이다. 그로 인해 인지, 언어 모든 생활능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잘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었다. 평상시에 늘 하셨던 개인의 역사 6•25 피난 시절 살아남았던 이야기이었다. 군대에서 한 손가락을 잃었던 사건과 기찻길에서 살아남은 사건, 볏짚에 숨어 북한군에 발각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그럴 때면 큰 웃음 지으며 옛날 전래동화 이야기하듯이 즐겁게 말씀하셨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에게 그 기억만은 오래 살아남았다. 그와 더불어 늙은 아버지의 목에는 국가유공자 훈장 메달이 늘 걸려 있었다. 메달도 아버지처럼 삭아갔다. 아버지 품에서 벗어난 기념 훈장의 메달 끈은 실밥이 나가고 닿아 끈 역할 하기엔 역부족처럼 보였고 노란 메달은 이미 오래전에 빛을 발했다.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그 형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10년 넘게 치매를 앓고 계신다. 어머니는 일명 착한 치매이다. 조용하고 말씀이 없으시다. 쭈그리고 앉아 방과 거실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휴지로 닦는다. 그럴 때면 휴지에 닦이는 먼지보다 어머니의 바지 엉덩이에 묻는 먼지가 더 많았다. 그리고 애는 뭐 하고 있니?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신다. 정신이 맑을 때는 간격이 길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채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반복해서 물어보시면 그때그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한 번은 어머님이 우리 집에서 잠시 식사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였다. 갑자기 어머님은 내 손을 잡으며
"밥 잘 먹고 간다. 용돈을 주고 싶은데 돈이 없구나. 미안하다."
하고 말씀하신다. 치매를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씀에 눈물이 고였다.
치매 앓기 전에는 자주 김치찌개를 해주셨다. 간혹 내 아이들도 할머니의 김치찌개가 먹곤 싶다는 말을 한다. 이제는 요리하지 않는다. 요리하지 않는다기보다 잊어버렸다.
치매는 알츠하이머 치매와 혈관성 치매로 나뉜다. 2020년 중앙치매 센터 통계에 의하면 65세 이상의 치매 중 알츠하이머 치매가 76.04%이며 전체 치매 환자 중 36.66%는 85세 이상이 차지한다. 퇴행성 알츠하이머병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발병되는 노인성 질환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들 볼 수 있는 질환이 되었다. 『치매의 모든 것』의 저자 휘프 바위선은 치매의 기억상실을 사라지는 일기장으로 비유한다. 또한 기억의 소실의 순서는 역순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순서적으로 이루어졌던 최근의 것들의 행동, 경험들이 기억에서 사라진다. 1년 전의 일기장이 그리고 차츰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어린 시절의 일기장만 남다가 결국 일기장 자체가 사라진다고 한다.
기억들이 잊혀 간다. 간직하고 싶었던, 소중했던 것들이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들이 되어 떨어져 나간다. 빈껍데기와 같은 육체만 움직인다. 그럼에도 그 누구는 맨 마지막 기억의 끈을 붙잡고 있다. 자신만의 빈 공간에서 관계의 스위치는 켜지고 꺼진다.
디올 서달원, <담다 - 사거리 탱자>, 2021.
* 대문 작품: 디올 서달원, <관계; 어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