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버들 Nov 03. 2022

귓속 그 좁고 컴컴한 구멍 안

-감정의 온도

    

(조심스럽게) “엄마, 귀지 좀 파 줄 수 있어.”

(귀가 날카로워진다) “ 안 돼, 성인인데 왜 아직까지 내가 네 귀를 파줘야 하는 거니. 싫다.”

(재촉한다) “그래도 파줘. 귀가 너무 간지러워.”

(단호하게) “안 돼. 싫어.”     


그리고 나는 나의 화를 참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딸은 귀를 자주 파달라고 한다. 어렸을 때는 자주 해줬다. 딸뿐만 아니라 아들과 남편도 마찬가지로 내 허벅지에 눕혀 놓고 귀속을 탐색하며 귓속의 때를 빼내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것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해주지 않으려고 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사랑이 식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귓속을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장치를 푼 것이다. 그만큼 믿는다는 것이다. 귓속은 예민한 곳이다. 귓속의 반고리관과 안뜰 기관이라는 두 평형기관은 몸의 회전과 기울기, 몸의 균형을 유지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며 청각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곳을 나에게 맡기려 한다. 봐달라고 한다.   

   


나는 가족에게 귀지를 부탁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게 편하다. 딱 한 번 나의 귓속을 맡겼던 사람이 있었다. 20대 초반. 다섯째 언니와 삼 년 이상 같이 생활한 적이 있다. 그때 언니는 귀지를 자꾸 파 주려 했다. 거절했지만 언니의 성화에 귀를 맡겼다. 사실 언니의 허벅지에 누워 내 귀를 무방비로 맡기는 것은 그리 탐탁지 않았다. 편하지 않았다. 누군가와의 살 접촉은 나에게 부담이었다. 가족임에도. 귓속에 귀이개가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귀지를 파냈다. 그리고 바로      


“앗”

나는 놀라 일어났다. 언니는 귀이개를 너무 깊이 넣었다. 저 귓속 끝에 귀지가 보였나 보다. 그것을 파기 위해 깊이 더 깊이 귀이개를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자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지금 같았으면 병원을 찾아가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이 있다면 치료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병원 개념이 부족했던 것일까. 개의치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제 가부터인가 전화가 오면 나는 수화기를 핸드폰을 왼쪽 귀에만 대고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오른쪽으로 듣게 되면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야 알았다. 귀에 약간의 이상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 하지만 생활에 큰 지장을 못 느껴 병원에 가서 확인하지 않았다. 조금의 불편이 익숙해졌다.     



방으로 들어와 이불속에서 내가 왜 이리 화가 나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너의 몸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나에게 부탁하지 마라.’

‘내 몸이 귀찮다. 그러니 나를 내버려 둬.’

‘한두 번도 아니고. 왜 그래.’

‘저 깊고 어두운 귓속을 보는 게 싫어.’

‘내 사랑이 식었어. 더 이상은 사랑을 갈구하지 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만 나의 머리가 메마르고 있다는 것이다. 감수성도 적어지고. 아무래도 나이가 자꾸만 먹어가서 그런가 하지만 그것은 핑계임을 알고 있다. 귓속에 대고 "너는 너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다. 가을과 겨울 사이 감정의 온도가 계절의 변화처럼 물상 하다. 식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더 식기 전에 이 감정의 온도를 높여야 한다. 


귓속 그 좁고 컴컴한 

깊은 구멍 안을 휘저으며 

파고드는

회오리같이 흔들리는 감정이 식기 전에 



이전 04화 꽉꽉 채워지고 비워지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