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숙제해결사, 꼬마요정과 구둣방 할아버지 & 우렁각시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싶고, 뭘 해도 다 안 되는 것 같은 그런 순간 말이다.
대학에 다닐 때, 벽돌집이 빽빽이 들어선 서울 골목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많은 골목 사이에 내가 들어가 살 방이 없다는 사실에 더 숨이 막혔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방은 없었다. 내내 방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보면, 더 이상 나아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곤 했다.
맥도 빠지고 갑자기 다리도 후들거렸다.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울어버리고도 싶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선택은 딱 하나밖에 없다. 천천히 왔던 길로 돌아 나오는 것.
그때는 그런 삶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평생 앞이 꽉 막힌 집이나, 반지하에 머물게 될 것 같아 인생이 공포스러웠다. 그것을 잊으려고 그렇게나 술을 마셔댔나 보다. 왜 그렇게 노래방은 많이 갔나 모르겠다. 모든 것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답답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잊고 싶어서 발버둥 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끝끝내 나는 방을 찾아내어 살았다. 단 하루도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잔 적이 없다.(아, 물론 친구들이랑 기차여행 같은 걸 갔을 때 빼곤 말이다) 부실하게 먹은 적은 있어도 돈이 없어서 며칠을 굶어본 적도 없다. 나의 삶이 꽉 막혔다고 생각되었던 그 순간순간마다 해결책은 솟아났다. 게다가 그러한 ‘생고생(?)’ 끝에는 늘 어떤 깨달음이나 근성 같은 것이 생겨났다.
돌아보면,
내 눈앞에 떡 버티고 있었던 여러 어려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어 지금의 삶을 만들었을까' 의아하기만 하다. 어떻게 해서 앞 뒤 환하게 뚫린 아파트에서 남편, 두 아이와 함께 가정이란 것을 꾸리며 살아가게 되었을까? 참 신기하기만 하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들이다.
나를 능가하는 어려운 문제 앞에서 무기력하게 멈춰서 있거나, 울어 버린 적이 많았다. 앞뒤 좌우를 보면서 어디 도망갈 곳이 없을까 잔꾀도 써보고, 발버둥을 쳐보기도 한다. 그런데 늘 문제의 해결은 의외의 곳에서 이루어졌다. 나한테만 이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여러 이야기 속에서는 의외의 도움이 많이 등장한다.
‘엉터리 숙제해결사’라는 책에는 위제니라는 아이가 나온다. 숙제를 하는 것은 정말 싫어하는 아주 평범한 아이이다. 그러면서도 숙제를 잘해서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고 싶기도 하다. 두 가지 마음이 팽팽히 맞서기 때문에, 위제니는 걱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때 마블이라는 괴상한 생명체가 나타난다. 오토바이를 타고 쌩하고 달려온 중년의 남성. 엄지공주처럼 아주 작은 이상한 사람. 자신을 숙제해결사라고 소개한다. 미심쩍었던 위제니는 도술을 부리는 것인지 어쩐지 모를 괴상망측한 방식으로 모든 숙제를 완벽히 해결하는 마블에게 자신의 숙제를 맡기게 된다.
숙제를 잘하다 보니, 학교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부모님의 칭찬도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위제니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칭찬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안감이 높아져 갔다. 결국 마블은 위제니로 변해서 학교에 가 학교 공부까지 대신해준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마블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엉뚱한 사고를 치질 않나, 일부러 숙제를 틀리질 않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위제니는 본인이 팔을 걷어붙이고 숙제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전에 몰랐던 글자를 알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괴상한 숙제해결사인 마블은 ‘그동안 자신이 숙제를 하는 동안 너는 어깨너머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난 떠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다.
숙제해결사 마블은 괴상하긴 해도 아이의 숙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멋진 해결사였다. 나쁜 존재들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주고, 결국에는 다 빼앗아 버린다. 반면 좋은 존재는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장시키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마블은 좋은 존재이다.
이 마블이라는 존재는 외부에서 온 도움의 손길이기도 할 테고, 위제니 내면에 있는 어떤 한 측면일 수도 있다. 둘 다 어려운 문제를 넘어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꼬마요정과 구둣방 할아버지>에서는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졌던 구둣방 할아버지들을 도와주는 꼬마요정들이 등장한다. 매일 밤마다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구두를 만들어 놓는데, 그게 다음 날이면 높은 값에 다 팔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금세 부자가 되었다. 고마웠던 구둣방 노부부는 요정들을 위해서 옷을 지어주었다. 그 후로 요정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길 하면 <우렁각시>를 빼놓을 수 없다.
성실히 농사일을 잘하던 총각은 밭일을 하던 중 이상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사람은 없고 우렁이 하나가 있어서 집의 항아리에 옮겨 놓는다. 그 뒤로부터 일을 다녀오면 밥이 한 상 차려져 있다. 이상하게 생각한 총각은 일 나가는 척하고 숨었다가 누가 밥을 차려 놓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우렁이가 처녀로 변해서 밥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너무 아리따웠다. 총각은 당장 치맛자락을 잡고서 같이 살자고 한다. 우렁이 각시는 지금 당장 같이 살면 슬픈 일이 생긴다고 좀 기다리라고 한다. 하지만 총각은 참을 수 없어서 바로 같이 살게 된다.
총각은 부인만 보는 팔불출이어서, 밭일 나갈 때에도 부인 얼굴을 나무에 붙여 놓고 일했다. 그런데 바람에 사진이 날아가 못된 왕 앞에 가 닿았다. 왕은 부인을 뺏어 자신의 왕비로 삼았다.
궁으로 가면서 우렁이 각시가 남편에게 ‘눈치 3년, 뜀뛰기 3년, 활쏘기 3년’을 배운 후 자신을 찾아오라고 당부했다. 남편은 눈치 배우기 위해 장사를, 뜀뛰기 배우러 줄타기를, 활쏘기를 배우려고 사냥을 각기 3년 동안 하며 수련했다.
결국 우렁이 각시를 찾아간 남편은 부인이 일러준 방법을 이용하여, 왕을 죽이고 부인을 되찾았다. 결국 논일을 하던 총각은 부인도 얻고 왕도 되었다. 엄청난 부인의 도움은 평범한 한 남자를 비범한 삶으로 이끌어 내었다.
여러 변주가 있겠지만, 우렁이 각시의 뒷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몰래 변신하여 총각 몰래 집안일을 다 해주는 것으로만 우렁이 각시를 기억했다. 그런데 우렁이 각시를 빼앗기고, 되찾는 여정이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숙제해결사, 꼬마 요정, 우렁각시
이 세 가지 보이지 않는 존재들, 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이름 없는 존재들은 주인공들을 단순히 도와줄 뿐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숙제해결사는 아이의 지적 성장을, 꼬마 요정은 할아버지의 경제적 성장을, 우렁각시는 남자의 사회적 성장을 이끌어주는 장본인이 된다.
사실 이러한 ‘천사’들을 만나게 된 것은 주인공의 노력과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착해서 상을 받았다? 고 보기에 위제니는 못되고 철이 없다. 구둣방 할아버지는 착하긴 하지만 무능하고, 총각은 참을성이 없다. 다들 흠이 있는 사람들인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도움을 받는다. 그러니,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함께하진 않았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도우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 본다.
어렵거나 힘에 부치는 일이 닥쳤을 때, 자주 떠올리는 말이 있다. ‘선험적인 기능’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이라는 책에 나온 말이다.
신화에서건 실생활에서건 여주인공이 딜레마에 빠졌을 때는 할 수 있는 일이란 뭔가 기대하지 않던 도움이 나타날 때까지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고 원칙과 충절을 지키는 것뿐이다. 해결이 나리라는 기대와 함께 그 상황에 머무는 것이 융이 이름한 ‘선험적인 기능 transcendent function’에 해당하는 내적인 단계다(진 시노다 볼린, 2003,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또 하나의 문화, 393쪽 a).
이야기 속에서도 그렇고, 실생활에서도 딜레마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 그 상황에서 무언가 해 보겠다고 버둥대면 일이 더 커지기만 한다. 그 막막함을 견디고 불안한 그 상황에 머무는 것도 어쩌면 삶을 살아내는 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 힘을 빼고 막연히 때를 기다려 보는 것이다.
이러한 ‘뭔가가 나타나서 구해줄 것’이라는 줄거리가 원형적인 상황이다. 구원의 주제는 인간의 진실에 호소하고 있으며 이것을 주인공 여성이 주의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내면의 위기에 봉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녀는 포기하거나 공포에 쫓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모순을 의식 속에 붙잡아 두고 새로운 통찰력이나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명확한 사고를 위해 명상하거나 기도하는 것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곤경을 통과할 수 있는 해결책을 이끄는 작업이다(위의 책, 393쪽, b).
가만히 있으면서 뭔가가 나타나서 구해줄 것이라고 절실히 믿고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어쩌면 조용한 용기를 보여주는 행동일지 모른다.
구둣방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구두를 만들 가죽만을 남겨둔 채 조용하고도 편안하게 잠에 든다. 불편하지도 절규하지도 않는다. 내일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내일 할 일을 준비해 놓고 부인이랑 조용히 잠에 든다. 나 같으면 눈이 감기지 않았을 것 같다. 무능해 보이던 구둣방 할아버지는 사실 엄청난 멘털 갑이었던 것이다. 그는 끝내 자신의 마음을 지켰다. 그리고 그날 밤 보이지 않는 요정들이 날아와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날 밤, 화가 난다고 마누라를 패고, 소리를 지르고, 술을 퍼 마시러 밖에 나갔다면, 귀엽고 조그만 요정이 그 집에 들어갔을 리 없다. 인과관계는 딱히 없지만, 할아버지가 올바른 대응을 한 것이다.
성질 급해 빨리 우렁이를 각시로 맞이한 총각은, 결국 3, 3, 3년을 참고 기다리고 훈련하는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당장 임금을 때려죽이겠다고 궁궐로 달려갔을 수도 있다. 갖은 수단을 써서 자객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총각은 그렇게 하지 않고 9년을 기다렸다. 분명히 수가 생길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사실 장사랑 줄타기랑 사냥이 임금을 몰아내고 각시를 되찾는데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또 한 가지 더 생각나는 점이 있다. 나이 들어서 이런 책을 보니 성장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성장을 시켜주는 조연에게 마음이 간다는 것이다. 아이였을 때 이런 동화를 보았다면, 나는 성장의 주역이 되길 바랬을 것이다.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성공을 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있으면 좋지만 그리 절실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대신 나는 마블, 꼬마 요정, 우렁 각시가 되어 보고 싶다. 다른 이를 가르치고, 도와주고, 밀어주는 숨은 존재가 되어 보고 싶은 욕심이 슬쩍 생긴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 나는 곧 잊히게 된다. 모든 성취는 성과를 낸 사람이 가져갈 것이다. 그것이 도와준 사람의 마지막이다. 내가 도와주었다고 공로를 주장하더라도,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만을 기억할 것이다. 도와준 사람의 주장에는 크게 귀 기울이지 않게 된다.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성취한 사람이다.
그렇게 잊히는 것이 서럽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내가 알고 있을 것이고, 나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것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11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곡에 모이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수레의 기능이 있게 된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그릇의 기능이 있게 된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방의 기능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유는 이로움을 내주고, 무는 기능을 하게 한다.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97쪽)
유는 구체적인 이로움을 가져다 주지만, 진짜로 그것이 기능을 하게 해주는 것은 무다. 없음으로 의미를 완성하는 무의 아름다움. 어렸을 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 존재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가 진짜배기로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엄마는 가족 내에서 이름이 없지만, 그 자신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집 자체가 되어 버린다. ‘누구누구 엄마’, ‘누구누구의 아내’, ‘누구누구의 며느리’라는 존재가 없어진 누구누구를 상상해 보라. 세상 불쌍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꼭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꼭 나의 이름이 앞세워져야 하는 것일까. 주인공을 진짜 주인공으로 만드는 조연이 참으로 멋있고 능력자로 보인다. 그런 능력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고민은 바로 이것이다.
과연 누군가를 보이지 않게 도와주는 힘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