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복에 산다 & 반쪽이& 뾰족뾰족 레오 아저씨
지금까지 나의 모습에 완전히 만족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모습에 만족해 본 적이 단연코 없다. 내가 한 선택은 아쉽기만 하고, 내가 하는 방법은 무언가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고, 내가 살아가는 곳은 무언가 세련되지 못한 것 같고, 내가 생긴 모습은 밋밋하거나 뚱뚱해 보이기만 한다. 공부는 언제나 모자란 것 같고, 글쓰기는 여전히 부족하고, 말도 못 하고, 관계는 늘 어렵기만 하다.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다. 부족한 시선을 가지고 하나하나 조사를 하면 천하에 부족하고 하찮은 것이 바로 나이다. 평소에 이런 시선을 계속 간직하며 살아가면 늘 우울하고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화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고,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내 모습이 원래 멋져서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오늘 선택한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현실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뜻깊다.
<반쪽이>에 나오는 반쪽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의 반쪽만 갖고 태어났다. 몸의 반쪽만 있으니 생긴 것이 흉측하고 이상하다. 위의 두 형은 반쪽이를 놀리고 같이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날 형들이 과거 시험을 치러 떠났다. 반쪽이도 같이 가고 싶었지만, 형들은 반쪽이를 대동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귀찮기도 하고, 어쩌면 완전하지 못한 존재가 동생이라는 것이 ‘쪽 팔렸’을 것이다.
그래서 쫓아오는 동생을 나무, 바위 등에 묶어 두거나 칡넝쿨에 감아서 동물의 소굴에 던져 놓는다. 그런데 반쪽이는 의외로(?) 힘이 세서, 아예 나무나 바위를 통째로 옮겨서 집에 가져다 놓거나, 동물을 다 잡아서 가죽을 벗겨 버린다!
그러면서도 불평을 한 마디 안 한다. 형을 탓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떡을 해주겠다고 한다.
<내 복에 산다>에 나오는 복남이는 또 다른 멘털 갑이다.
아버지 슬하에 사는 딸인 복남이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말했다가 쫓겨난다.
사연은 이렇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누구 덕에 이렇게 잘 먹고 사느냐?’라고 질문을 했다.
위의 두 딸은 모두 그 덕을 아버지에게 돌렸다.
셋째인 복남이는 눈치 보지 않고
“그야 내 복에 잘 살지요.”라고 대답한다.
복남이는 그 자리에서 바로 쫓겨난다. 조선 시대 여자 아이가 집안에서 쫓겨난 것은 거의 죽음에 처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복남이가 눈치가 없어서 이렇게 말했을까?
위에 언니들이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복남이는 아버지에게 무릎 꿇지 않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 밑에는 자신이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근자감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복남이는 집에서 쫓겨 나서도 굶어 죽거나 빌어 먹지 않고,
가정을 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부지런히 생계를 해결해 나간다.
물론 예전처럼 기와지붕 밑에서 비단옷 입고 지내진 못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복남이는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쌓지 않은 부유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다.
스스로 살아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은, 자기 자신에게 복이 있다는 자기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삶에서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뾰족뾰족 레오 아저씨>는 글뿌리 시리즈에 있는 창작 동화. 우리 딸아이가 계속 읽어달라고 해서 수십 번쯤은 읽었을 책이다. 읽을 때마다 참으로 감동을 주어서 나도 좋아라 하는 책이다.
레오 아저씨는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칼갈이이다. 레오 아저씨의 아버지도 이 칼 가는 차에 살면서 칼 가는 일을 했다. 레오 아저씨는 유년 시절을 이 트럭에서 지냈을 것이다. 생활이 아주 불편했을 법하다.
하지만 레오 아저씨는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를 증오하며, ‘나는 이 따위 칼갈이는 하지 않아!’라며 집 아니 트럭을 떠났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하고 있다.
이 작은 일을 정성스럽게 해서 이 마을에 단골손님을 많이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칼 가는 기계가 등장했다. 거의 반 값에 빠르게 칼을 갈아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싸고 빠른 칼 가는 가게에 달려갔다.
손님이 모두 사라진 레오 아저씨는 마을을 떠나고야 만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라곤 칼 가는 것 밖에 없고, 가진 것이라곤 칼 가는 트럭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멘털이 붕괴될 법도 하다. 믿었던 마을 고개들이 한꺼번에 등지는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레오 아저씨는 마을 사람을 탓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고 쓰러지지도 않았고, 자포자기하지도 않았다.
요즘 뜬다 하는(?) 푸드 트럭으로 자신의 업종을 바꾸지도 않았다.
이미 마을에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맞춰서 업종을 바꾸었다면 인맥으로 사업이 어느 정도 됐을 수도 있다.
그는 결코 상황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레오 아저씨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자신을 꼭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지 않다면, 이런 선택을 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블루오션(그야말로 바다)에서 성공을 하고, 기존에 자신을 찾았던 손님들까지도 다시 되돌아오게 만드는 기분 좋은 결말을 맞는다.
반쪽이, 복남이, 레오 아저씨.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멘털 갑의 주인공.
그들의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몸이 반쪽밖에 없는 사람이고, 조선 시대의 딸로 아버지의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갑갑한 신세,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고객이 모두 일탈한 상황.
나 같으면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억울하고 분해서 남이나 상황을 마구 탓했을 것 같다. 내가 만약 힘을 가졌다면, 나를 이렇게 만드는 사람들, 나를 업신여겼던 사람들에게 모두 한 방을 먹였을 것이다. 문제는 나에게 힘이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힘이 없으면 없는 대로, 골탕을 먹이거나 비아냥 거리거나 은근히 말을 듣지 않는 ‘수동적 공격’을 해서 세상을 향해 분풀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어딜 가서든지 스스로 일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공격이나 방어를 하지 않는다. 대신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추고, 필요한 일을 해나간다.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에너지를 쓰는 것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간다.
어쩌면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을 위해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세상 어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위할 줄 아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잣님 말씀인 논어는 이렇게 시작된다.
공자 말씀하시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하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랴!
학이시습지....
이렇게 시작하는 문구를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쁘다는 이 말을 들어서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나에게는 이 절의 마지막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랴!
아주 오랫동안 나의 시선이 바깥으로 나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이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열심히 한 적이 있었던가. 내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도 노력해 온 것은 아니었나. 혹은 남들에게 피해받지 않을까, 상처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버텨온 것이 아니었을까?
이 말과 마주했을 때, 여러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쳤었다.
지금도 이 질문은 계속 내면 속에서 반복된다.
내가 하는 일이 남이 알아주길 바래서 하는 일인가 아닌가.
학생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려고 수업을 준비하는 건 아닌가, 학생의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건 아닌가.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것이 주위 사람에게 보여주고, 부모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닌가.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어른이 돼서 나를 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양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고, 모임을 하는 것이 버려지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아닐까. 그 사람들에게라도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소속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여러 생각이 맴돌곤 한다.
그 질문들 가운데 나는 철저히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참으로 배려하지 않는 고민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는 것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 식대로 살 거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논어의 또 다른 부분에는 ‘군자는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되 똑같아지지는 않는다’는 말이 나와있다. 군자는 상황과 사람에 잘 맞추어 가는 사람이다. 단지 그들과 똑같아지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소인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똑같아지려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매일 다투고 험담 하면서도 같이 붙어 있으면서 똑같은 평수의 집, 똑같은 학원, 똑같은 명품을 갖고자 욕망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난 늘 고전을 읽으면서 내가 소인이라는 걸 아주 많이 확인한다)
내가 군자까진 아니더라도,
주어진 사람들, 상황...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가는 것
그리하여 행운도 만나고 재산도 얻고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 잘 사는 것은 조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반쪽이, 복남이, 레오 아저씨의 노하우를 좀 따라 해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