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베 얀손의 <무민 가족과 보이지 않는 손님>
가끔씩 투명인간으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존재는 하지만,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얼굴 붉히지 않고 살아가면 참으로 편할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고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곧 꿈에서 깨어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닌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란 것을 깨닫는다. 만약 무인도나 산속에 들어가서 산다고 해도 있는 듯 없는 듯 흔적 없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서 삶의 모든 부분을 해결할 수 없으니, 분명히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그 누군가에게로 전달되고, 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나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 안에서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갈 것이다. 투명인간의 꿈은 저 멀리로 달아나고야 마는 것이다.
가끔씩은 원치 않게 투명인간으로 취급된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딴 세상 사람처럼 보이고,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아 답답하고 막막할 때 말이다. 그럴 때는 유명한 팝송 Creep의 유명한 가사 'I'm not belong here~(난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어렵고 벅차면, '나는 이곳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이야', '여기에 맞지 않나 봐'라고 생각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멀어지고야 만다.
이런 느낌이 들 때는 여지없이 울적해지고 침체된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나의 자리를 지우면서 슬퍼하곤 한다. 이런 상태에 머물다 보면 이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수치심' 혹은 '부끄러움'
수치심이 한 번 자극되어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혼자서 멈추기가 어렵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안 돼', '나는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활력이 뚝 떨어지고 만다. 아무것도 하지 않길 소망하고, 세상에서 꺼져버리고만 싶어 진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무민 시리즈. 제목이 <무민 가족과 보이지 않는 손님>이었다. '왜 보이지 않는 걸까' 궁금했는데, 책장을 넘기다보니 수치심에 모습을 잃어버린 나와 같아 공감이 되었다.
무민 골짜기를 방문한 '보이지 않는 손님'의 이름은 '닌니'이다. 닌니는 친척 아주머니에게 상처를 입고 투명한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닌니, 저 아이는 친척 아주머니 때문에 잔뜩 겁먹었어요. 정말 끔찍한 아주머니였어요. 화내지는 않는데 쌀쌀맞더라고요. 차라리 가끔 화를 내면 이해할 텐데 말이에요. 닌니는 하루가 다르게 흐려졌어요. 지난 금요일에는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고요. 아주머니는 언짢아져서 저한테 닌니를 맡겼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돌보겠냐면서요.
닌니가 투명 인간이 된 사연이다. 닌니는 겁이 많은 소녀이고, 쌀쌀맞은 아주머니와 살다가 점점 자신을 잃어버렸다. 정체가 사라지자 쌀쌀맞았던 아주머니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
닌니는 잘 놀 줄도 모른다. 무민과 미이와 함께 강으로 놀러 갔는데, 닌니는 다른 사람(?)과 재미있게 지내는 법을 몰라했다.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무민과 미이와 닌니는 강으로 놀러 갔어요. 하지만 닌니는 놀 줄 몰랐어요.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지만 하나도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어요. 술래인 무민이 잡으려고 하자, 닌니는 도망칠 생각도 않고 순순히 잡혔지요. 그러자 미이가 소리쳤어요.
"어휴, 그럴 때는 뛰어! 깡충깡충 뛰라고!"
그제야 닌니의 가느다란 두 다리가 달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금세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멈춰 서자, 미이가 닌니에게 소리쳤어요.
"힘이 하나도 없나 보지! 혼쭐이 나고 싶은 거야, 뭐야!"
닌니가 가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민이 중얼거렸어요.
"닌니는 정말로 놀 줄 모르는구나. 정말 안됐다!"
화를 낼 줄도 모르고 저항할 줄 모르고 노는 법을 모르는 닌니는 온몸이 투명해져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안타까운데, 왠지 남 이야기 같지 않다. 아이들 읽어주려고 빌렸는데, 왜 내 눈에서 눈물이...
현실 버전으로 다시 풀어보자. 닌니는 부모가 없는 고아이고,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는 정서적 학대가 일상이었다.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거나 가르치지도 않고, 그저 냉담하게 방치를 했던 것 같다. 차라리 아이를 때렸다면, 그 친척 아주머니는 공분을 살 것이고 명확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닌니는 명확히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자신이 지금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모호함 속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견뎌야 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린아이였을 때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무언가를 만들어 먹을 수도 없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도 없으며, 추위와 더위를 몸으로 견뎌낼 능력도 없다. 생존에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상태에서 주위의 보살핌과 도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크고 놀라운데,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재주도 없어 늘 부정확한 판단을 하며 실수를 연발한다.
아이에게 이미 세상을 살았던 이들의 안내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런 것이 없이 맨몸으로 세상과 맞부딪히는 일은 두렵고 두려운 일일 것이다. 이때 '괜찮아, 저건 무서운 게 아니란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며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두려움이 가득하고 아무런 힘을 갖추지 못한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지우는 일뿐이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되지 않고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용한 존재가 됨으로써 천천히 자신에게 악영향을 주는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 어떤 면에서 보면,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된 셈으로, 작전 성공이었다. 더구나 무민 가족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서서히 '회복'해 가는 일이 남았다. 그동안 지웠던 자신이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찾아가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까지 자신을 지우며 사는 법 밖에 알지 못했던 소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다행히 무민 마마는 닌니에게 세심한 관심과 배려를 선사한다. 외할머니의 비법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를 되살리는 약을 만들어 닌니에게 먹인다.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부드럽게 이야기해주고, 천을 이용해 빨간색 원피스와 머리띠를 만들어 준다. 이런 지극정성을 알았는지 닌니의 몸은 발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런데 얼굴은 어찌해도 보이지 않았다. 심술궂은 미이는 "넌 싸울 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을걸!"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여기에 닌니는 '그렇구나'하고 수긍하며 말을 끝낸다.
이거 나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맞부딪혀 본 적이 거의 없다. 살면서 남편이랑 싸워본 적도 별로 없는데, 이건 자랑이 아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싸울 기력이 없어서 안 싸우는 것뿐이다.
부모님에게 화를 내 본 적은 더더군다나 없다. 무언가를 요구해 본 적도 별로 없는 듯하다. 부모님은 별 탈 없이 모범생으로 커 준 딸이 편하고 좋을 것이다. 시부모님에게 대든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이래저래 부딪히는 일을 잘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원하는 것이 좌절되었을 때, 화를 내지 않고 닌니의 친척 아주머니처럼 냉담하거나 쌀쌀맞게 군다. 직접 맞부딪힐 자신이 없으니까 뒤로 뚱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쌀쌀맞음도 오래가지 못하고 잊어버린다. 대신 닌니처럼 차라리 아무 존재가 되지 말자고 다짐하며 느적느적하며 산다. 수치심의 늪으로 다시 다이빙.
다행인지 순리인지, 결국 닌니는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고야 만다. 자신을 알아봐 주고 돌봐주었던 무민 마마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던 상처받은 영혼 닌니는 다른 사람을 지키고자 힘을 쓰며 얼굴을 되찾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 마을 골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어떤 아이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언술이 딸리다 보니 일방적으로 밀렸다. 억울하고 분했고, 다시는 그 아이와 싸우지 못했다. 그 아이가 사실상 골목의 패권을 잡은 것이고, 나는 죽어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약골(로 보이는) 내 동생을 그 골목대장 아이와 똘마니들이 놀리고 괴롭히고 있었다. 너무 열이 받아서 그 아이의 등짝을 '짝' 내리쳤다. 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집안으로 쏙 들어가 문을 잠갔다. 등짝을 내리칠 때 뒷일이 두렵긴 했지만, 찰진 '짝'소리와 함께 얼마나 통쾌하던지...
열이 받은 아이들이 옥상에 올라가서 들이 뛰면서 항의를 했다.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한 데 얻어맞을까 봐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별일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갑자기 용감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겁이 많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때의 통쾌함과 손맛만은 잊지 않고 있다.
마음이 울적할 때 몇 가지 찾아보는 유튜브 영상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정혜신 TV이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ZGIO481olUgjB6UgU1EBg/featured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가 고민상담을 해 주는 형식의 유튜브 채널이다. 여러 사람의 고민도 들을 수 있고, 여기에 상담을 해주는 목소리가 좋아서 가끔씩 듣는 편이다. 선생님의 글도 좋아하고 말이다. 이 채널에서 우연히 이런 내용을 들었다. '글을 쓰신 분은 세상을 상수로 두고, 자신을 변수로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이나 상대방에게 무조건 자신을 맞추려고 하세요. 그러면 자신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나도 '나 스스로를 변수로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어진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반응은 원래 그런 것으로 두고, 내가 다 맞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 보니 역효과가 나서 늘 마음이 피곤하고 불안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과,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아'라고 판단하고, 점점 사라지는 길을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나 자신이 마음을 열고 변화하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꺾어가면서 다른 상황과 사람에게 맞출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도 생명이고 한 존재이기에, 내 마음대로 나라는 존재를 지우다 보면, 꼭 탈이 나게 마련이다.
상대도 배려하지만, 나도 배려하는 그런 선택이 매 순간 필요하다. 얼굴이 있는 사람으로 살면서,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