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당신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아요'
예전에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서 책도 많이 읽고 수업도 들은 적이 있다. 박사과정 3학기 코스웍을 하는 동안에는 고려대에서 학점교류로 심리학과 수업을 정식으로 듣기도 했다. 우리 학교에는 심리학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교육대학원에 교육심리 트랙이 있어서, 그곳에서 또 심리 수업을 들었다. 난 신방과인데 실제로 학점은 심리학과와 교육학과에서 다 땄다. 나의 관심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리... 사람의 마음.
여러 심리 수업을 들었었는데, 상담 심리라는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치료라는 목적에 가장 가까운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치료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젊었던 시절 참으로 아팠고-그렇다고 생각했고, 상담을 받으러 다닐 돈도 없었기 때문에 자가 치료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기대와는 다르게, 그 수업은 상담심리학 수업이었지 상담을 해주는 자리는 아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업 시간에 심리학에 대해 다룰 뿐, 학생 개인의 병리나 심리를 다뤄주진 않았다. 발제, 발제, 발제, 리포트... 꽤 건조한 시간이었다. 그 대신 엄청나게 많은 상담심리 학파와 심리 기법에 대해 줄줄이 배웠다. 그때는 지적 호기심이 왕성할 때여서 그 새로운 개념들이 쏟아지는 것이 너무나 신났었다. 공짜로 상담을 받을 줄 알았던 기대는 무너졌으나 여러 유용한 개념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에 자못 설레었고, 그것이 바로 힐링 포인트가 되었다.
그때 배웠던 단어 중에 참으로 신기했던 단어가 이것이다.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 인간 중심 치료라는 접근을 한 칼 로저스가 내세운 개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사람의 의견과 행동을 존중해 주라는 것이다. 특히 아이들을 대할 때 철저하리만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주라고 하였다.
나에게 이 말이 참으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누군가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준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사람들은 조건을 내걸었다.
'~하면 ~해줄게.'
늘 내가 사는 세상은 타협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늘 불리한 협상자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매일 지는 싸움을 하는 것만 같아 성질이 마구 나곤 했다. 하지만 계속 싸우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지더라도 계속 싸우며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무언가 하나를 얻어 내려면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마음이 편히 놓일 날이 없었다.
그런데 '~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아도 괜찮고, 무조건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상한 셈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그동안의 노력이 참으로 안쓰럽게 느껴졌다.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상을 타지 않아도, 착하게 굴지 않아도, 말을 잘 듣지 않아도, 예쁘지 않아도 그럭저럭 나는 살아갈만한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했었던 것일까. 심지어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도 별로 인정과 관심을 받지 못했었는데도 말이다. 잘못된 인과관계의 사슬에 묶여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고만 있었다.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 누군가에게 받아보고 싶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을 실현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하는 말을 보면, 이 개념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아이에게 매일 조건을 걸고, 내 마음대로 해주길 바라고 있다. '너는 내 말을 따라야 해', '너는 내가 사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야만 해.'라는 암묵적인 주장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나날들이 많다. (이론과 너무 먼 현실~~)
또한 아이가 내 영역을 침범해 온다는 생각이 들면, 정신 경고등에 빨간불이 삐용삐용 들어오기 일쑤이다. 짜증이 확 일어나고 갑자기 피곤해진다. 말은 그렇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밀어내려고 한다. 확실히 나의 조건을 아이에게 들이밀고 그대로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이미 '조건-통제'라는 순환 고리에 익숙해진 나는 기존에 하던 방식대로 나가고 만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나의 자동 시스템을 그대로 보여줄 수도 없다.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이중 줄타기를 하게 된다. 그것이 위선적인 것일지 몰라도 충동적으로 마음속에 올라오는 모든 감정을 아이에게 바로 내비칠 수는 없다. 최대한 안에서 녹여서 '인내, 인내, 인내'하여 아이를 수용해 본다.
그런데 또 하나 거대한 벽에 부딪힌다. 억지 수용이라도 해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 존재, 바로 남편이다. 남편이 어떻게 하든, 어떤 상태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안데르센의 동화 '당신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아요'에서는 극강의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을 해 주는 아내의 모습이 나온다. 이 부부의 집은 원래도 가난하다. 아내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말을 시장에 내다 팔아 오라고 남편을 시킨다. 남편은 더 가치가 없는 것에 마음이 팔려서 말을 쓸모없는 물건(썩은 사과)과 바꾸게 되었다. 아내는 이런 남편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뽀뽀를 해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아내의 이런 태도가 남편의 어리석음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나서서 손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아내는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이렇게 철이 없는 남편이 갑자기 변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르친다고 해서 바뀔 일인가. 다그친다고 해서 바뀔 일인가.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주 쉽지 않다. 가장 쉬운 것은 내가 바뀌는 것이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하고 내가 바뀔 수밖에 없다. 우선 경제적으로 가장 저렴하고 간단한 방법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당신이 언제나 옳아요'라고 말해주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무능한 남편에게 자신의 감정을 매달지 않는다는 결정이고,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에 얽매여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다른 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받아들여 주는 사람은 분명히 자기 자신도 기꺼이 온전히 받아들여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은 그런 면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편이나 아이 좋으라고 그 사람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나도 나 자신을 인색하지 않게 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으로 치유가 되는 것은 상담의 대상인 내담자가 아니라, 상담자 자신이다. 아이와 남편이 아니라, 엄마 혹은 아내 스스로가 치유된다.
역시나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만, 그래도 억지로 '너는 언제나 옳아', '당신은 언제나 옳아요'라고 말해 본다. 남편이 퇴사한다고 하는 것을 응원해 줘 본다. 아이의 독특한 패션을 인정한다. 머리를 감지 않아서 빗질이 되지 않는 것도 옳다고 해보고, 비누로 10번 손을 씻어도 기다려 본다. 더 나아가, 아이들이 제 멋대로 돌아다녀도 내버려 둬 본다.
그것이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기에... 결국 제 자리를 찾아가는 혼돈의 과정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 보는 것이다. 당장 다그치고 내가 할 수 있는 깜냥으로 해결해 버리면 순간의 문제는 해결되지만, 그곳에서는 분노와 좌절, 무기력함이 대가로 남는다. 너무나도 밑지는 장사이다.
지금의 나도... 계속 흔들리고 혼란스럽지만, 결국엔 맞는 궤도를 찾아갈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나는 언제나 옳았다. 여러 방황과 시행착오를 겪었어도 결국엔 더 크고 좋게 되었다.
분명해 손해 보는 것 같았지만 결국엔 얻었다.
혼돈 속에서도 사리분별력을 갖추었고, 더 겸손할 줄 알게 되었으며, 의외의 해결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언제나 옳다.
가는 방법과 수단은 쫌 허술할지라도, 당신만은 옳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