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에서 다시 시작하기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남은 건 논문뿐이었다.
'이제 논문만 쓰면 되겠네.'
그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축하일 수도 있지만 내겐 숨을 조이는 문장으로 들렸다.
주변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언제쯤 쓸 거야?'
'논문은 쓰고 있어?'
나도 안다. 써야 한다는 걸.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는데...
내 잘못이 아닌데 그 질문들은 나에게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그런 내게 어느 날부터인가 알고리즘은 ADHD 증상을 끊임없이 보여 주기 시작했다.
'혹시… 나도?'
알고리즘은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래서 나는 정신의학과를 찾아가기로 했다.
초진 예약을 잡으려 전화한 첫 번째 병원에서 들은 말은 예상 밖이었다.
'초진예약은 올해 다 마감됐어요.'
순간 멍해졌다.
내가 지금 필요한 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에 가까운 무언가였는데,
현실은 한참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병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마음이 아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동안 나는 내 문제를 너무 개인적인 것으로만 여겼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약해서, 내가 이상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그런데 예약이 꽉 찼다는 사실은 이게 너무 흔한 일상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흔하다는 건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몇 군데 더 전화를 돌리던 중,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 생긴 병원이라면… 혹시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반쯤 기대를 접고 전화를 걸었는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예약 가능하세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치 누군가 내게 '괜찮아, 여기로 와'라고 말해준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검사도, 상담도, 치료도.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제 나는 건강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는 논문도 언젠가 쉽게 써질 것 같았다.
물론 당장 달라질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논문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쉽게 써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 나는 희망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