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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서영 Mar 11. 2024

에고(ego)와 순종

<에고(ego)와 순종>                                                  



 오늘 류시화의 글에서 ‘무명’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그 ‘무명’이라는 이름은

류시화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름 그대로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어느 날 류시화의 집에 찾아온 낭인이었는데 무작정 명상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며 가지를 않아서 머리를 깎으라 했더니 바로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바람에 삭발을 시키고 데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류시화는 그런 그에게 온갖 궂은일과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두 해를 데리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제주도로 떠나는 바람에, 팔아버린 빈 집 앞에 남겨두고 기약 없이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 무명 씨와 지내는 동안 류시화는 명상을 가르쳐 주기는커녕 명상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틈에도 끼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잡담을 싫어했던 류시화는 그와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았으니 따뜻한 말 한마디가 오갔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런 류시화의 밑에서 말없이 순종하며 엎드려 살았던 그를 헤어진 지 15년쯤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깊이 있는 스님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지난날의 미안함과 그리움을 떠올리며  눈물의 상봉을 하고, 그 길에서 다시 헤어지면서 그 사람의 깊이에 대해 생각하는 글이었다.  무명 씨의 말없이 순종하던 모습에서 류시화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순종이라는 것이 참 고귀한 관념이라고 생각했었다. 성경의 아브라함도 그랬고 유독 성경에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많이 강조했었기 때문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은 고귀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순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늘 나의 고집에 의지해 살았고 나의 에고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붙잡고 버티며 살아왔다. 나의 에고를 잃어버린다면 나는 살아갈 힘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다. 나의 자존심, 나의 자부심만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었다. 


  그런 나도 나의 에고를 죽여 버린 적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도저히 나의 에고를 지킬 수가 없었을 때 나는 나의 운명에 순종해야 했다.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에고를 붙들고 울부짖고 몸부림치다가 그냥 놓아버렸을 때 나는 운명에 순종하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팽팽히 당겼던 줄을 놓아버리듯이 에고를 놓아버렸을 때 편안함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평화라기보다는 끈을 놓아버린 허망함이라고 할까. 끝끝내 지킬 수 없어 놓아 버린 허탈함의 끝이었다고 할까. 슬픔마저 존재하지 않는 망연한 피안이었다고 할까.  


  운명에 순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나는 에고를 잃어버린 나를 죽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죽음의 끝에 가서 죽음은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에고이든 순종이든 살아있는 것만이 값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냥 ‘끝’이었다. 어둠의 끝. 깊숙한 어둠 속. 끝없는 블랙홀. 다만 살아있어야 순종이든 에고든 의미가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 죽음 앞에서는 의미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존재이든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죽음 앞에서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어떤 단어, 어떤 의미, 어떤 행동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삶에서는 고통과 비난과 어떤 불행조차도 의미가 있게 된다. 살아있음의 의미. 그것은 어떠한 가치보다도 커다란 것이었다. 그런 삶의 눈부심을 알고 난 후부터 나는 나의 운명에 순종하며 살게 되었다. 살아있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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