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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18. 2022

더미 런

22.12.18. 2022 카타르 월드컵 3위 결정전


K리그의 자랑 오르시치 아니 오르샤 아니 오르시치


#

미친듯이 오르는 난방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보일러를 끄고 전기 담요 안으로 들어갔다. 뭉근히 퍼지는 온기에 기대어 월드컵 3위 결정전을 봤다. 대부분의 토너먼트 대회에서는 치르지 않는, 오로지 두 팀 사이의 순위를 결정하기 위한 (혹자는 FIFA가 중계권료와 관중 수입을 챙기기 위해 치르는 경기라는 비판도 하지만) 경기라 그런지 KBS1만 중계를 했다. 뭐어, 우리가 직접 올라가는 게 아닌 이상 '패배자들' 사이의 경기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래도 3위 결정전의 장점이 있다면, 승패에 대해 부담이 조금 적어서 수비 위주의 팀들도 공격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골이 많이 들어가고(캐스터의 말에 따르면 경기당 3.8골 정도가 들어간다),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이 선발로 투입되거나 빨리 교체선수로 들어오게 되어 그간 벤치에만 있었으나 좀 보고 싶었던 선수들을 볼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어쨌든 최고의 선수들이 치르는 경기를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나.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그러니, 투덜댈 수는 있지만 경기를 안 볼 수는 없다. 


명성에 걸맞게 두 팀은 그동안 교체로만 들어온 선수들을 선발로 내세우고, 과감히 공격에 나섰다. 긴장감도 살짝 풀려서 실수들이 잦아지고 골도 초반부터 나왔다. 시작한지 7분만에 크로아티아의 변칙적인 세트플레이가 성공해 수비수 그바르디올이 멋진 헤더를 성공시켰고, 이어 1분 정도만에 모로코의 아쉬라프 다리 선수가 크로아티아의 세트피스 수비 실수를 틈타 헤더 동점골로 따라갔다. 전반 끝나기 직전엔 K리그가 키운(...) 오르시치 선수가 오른발로 감아찬 공이 야신 부누의 손에 스치고도 골대로 들어갔다.


치열한 전반전이 끝나고, 하프타임 광고가 흐르는 동안 으레 부부들이 그러하듯 미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며칠 전, 부서를 옮기는 게 어느 정도 확정되었다. 무려 3년만인데, 걱정이 많았다. 돌아가면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관종끼에 질투심이 많은 내가 다른 사람 잘 되고 나 안 되면 스트레스 잔뜩 받을텐데... 가서 실패하면 어쩌지? 아내는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실패할 거라고 왜 확신해?"

"그런 건 아니지만, 걱정은 돼. 내 이름을 걸고 만든 유명한 프로그램 하나 없는데, PD는 방송으로 말하는 거라잖아? 그럼 난 한 게 없는 것 아닐까..."

"난 자기가 PD로 일하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제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생각했어."

"왜?"

"프로그램 이야기를 할 때만큼 신난 걸 못 봤거든. 그러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


내가 그렇게 목소리에 고저차가 있었나. 사실 다양한 시사/보도 프로그램들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기억도 많았지만, 괴로운 기억도 많았다.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경험 때문에 마음의 병을 키우기도 했고, 밤샘과 잦은 출장으로 몸 건강을 갉아먹기도 했다. 좋은 결과도 별로 없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로서 좋은 평가를 받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발전 없는 모습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을 만큼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점에 우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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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공격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 있으면서 경기를 수비수의 입장에서 보기도 하고, 벤치나 관중석에서 보게도 되었다. 그 덕에 생각이 좀 달라졌다. 골이 들어가야 승패가 결정되지만, 이기기 위해 내가 꼭 공을 잡아서 직접 골을 넣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공격수가 별로라는 소리가 아니라, 경기를 보는 시야가 예전보다 조금 더 넓어졌달까. 그러니 보이는 게 있다.


더미 런이라는 게 있다. 공을 가랑이 사이로 빠트리는 페인트란 뜻도 있고, 상대방을 속이는 움직임인 디코이 런을 뜻하기도 한다. 공을 실제로 잡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게끔 이동해서 실제로 공을 받을 선수에게 가해지는 관심과 압박을 줄이는 게 목적이다. 이게 잘 통하려면, 진짜로 공을 잡는 것처럼 전력을 다해야 하고, 또 부지런히 공이 올법한 곳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더 많은 선수들이 움직일수록, 공격 성공률은 높아진다. 골은 마킹이 빗나가는 순간에 만들어지니까.


모두가 골을 넣고 싶지만, 누군가는 더미 런을 열심히 뛰어야 한다. 모두가 공을 잡으려고 한 곳으로 모인다면 그 누구도 공을 잡진 못한다. 누군가는 공이 자기에게 오지 않을 것을 알고도, 공이 올 법한 다른 곳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니 경기 내내 공을 잡지 못했다고 해서, 그 선수가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뛴 만큼, 오늘의 스트라이커는 쉽게 넣는다. 반대로 누군가가 열심히 더미런을 뛰어준 덕에 내게 골을 넣을 수 있는 찬스가 쉽게 올 수도 있다. 그것이 팀 플레이다.


내가 평생 더미 런만 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경기에 뛰지 않을 것이기에 축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펩 과르디올라의 전술처럼, 경기장의 특정한 위치에 서면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하라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나는 수비수인 동시에 골을 넣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되겠지. 더미 런은 그 믿음 덕에 더 진지하게 수행이 될 것이고, 그 결과 누가 정말 공을 잡고 골을 노리는지 알 수 없는 수비 입장에선 곤란한 경기가 될 것이다.


더미 런의 시간이 길 수 있다. 그 행위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믿음이 있다면,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아내는 내가 앞으로 뛰어나갈 때마다 공을 잡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길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해도 웃을 수 있다면, 그런 믿음들 덕분일 것이다. 글을 다 쓰고 나니 경기는 끝났다. 모드리치의 '라스트 댄스'(아닐 수도 있다)는 승리로 끝났다. 나는 똑같은 베테랑이지만 결국 한 경기도 뛰지 못한 비다를 떠올린다.


도마고이 비다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준우승을 기록한 크로아티아의 주전 센터백이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최종 명단에 합류했지만, 걸출한 능력을 지닌 그바르디올 같은 선수들 때문에 3위 결정전에서도 결국 뛰지 못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윤정환 선수처럼) 그러나 그는 웃었다. 나는 항상 그 웃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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