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카-NGO 봉사단으로 선발되어 건강검진을 받았으니 8부 능선까지는 넘었다고 봐야 하나?
봉사단원들의 검진을 도맡아 시행했던 기관이어서 그랬는지 파견에 불리한 수치가 나오지 않도록 간호사들이 부쩍 신경을 써주었다. 이제 오십 중반으로 접어드는 그리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건만 봉사단원으로 해외에 나가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을 밟아왔다.
50이 되기 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단원으로 선발되지 못했다. 나의 전공이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상제작 관련 미디어 분야가 대외원조 카테고리에 존재하지 않았고 간혹 있다고 해도 방송국 세팅 등과 같은 더 전문화된 기술적 분야였다. 비슷한 범주를 꼽아봐야 IT나 컴퓨터 교육 쪽인데 그것은 내 분야가 아니었다.
어쩌다 두리뭉실한 분야에서 서류가 통과되어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그때는 40대 후반의 나이가 관건이 되었다. 파견하는 기관의 관리자들과 연령이 비슷해서 뭔가 껄끄러운 면이 있었던지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선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났다.
2020년 해외로 파견되어 있던 지인은 코로나로 인해 남미 현지에서 급히 철수해서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교육자문단으로 남미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겨우 2개월도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그 후로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간간이 필요한 인력을 뽑아서 보내는 가 싶었는데 그나마도 파견 기준이 강화돼서 만 60세에서 10살이나 적은 50세 미만의 건강한 남녀로 제한시켜 놓았다. 대략 60에 은퇴한다고 해도 이후에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많고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중단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런 제한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에 제한을 둔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라 여기면서도 특수한 상황이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원이로되 상황이 참 안 도와주는구나' 아쉬워하며 코로나의 장기화에 체념하고 있었는데 올 들어 봉사단원의 나이가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려졌다. 신체 건강한 60세 미만의 남녀로 정정된 것이다.
이전의 조건으로 회복돼서 완화된 것만으로도 기뻤고 한줄기 서광이 비추는 것 같았다.
이런 배경을 알았는지 어쨌는지 파견 전 최종 건강건진을 도우며 혈압을 재던 간호사는 나의 혈압 수치를 보더니 더 안정적인 수치를 얻어야 한다며 나를 배려하고 진정시키며 여러 번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친절이 고마웠다. 한편으론 이제는 다른 게 다 통과돼도 건강에서 퇴짜를 맞을 수 있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휑해졌다. 컴퓨터로 인성 적성 검사 비슷한 것도 마쳤다. 12월 말부로 파견이 확정되었으니 그 사이에 여러 가지 교육이 진행될 예정이다.
르완다의 고등학교로 가면 영상제작 실습을 가르치게 될 것인데 가능하다면 학교기업을 만들어서 졸업하는 학생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볼 계획도 세워본다. 여기나 거기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을 갖는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르완다 학교의 살림을 맡고 계신 선교사님도 잠시 귀국하셔서 그곳으로 싣고 갈 컨테이너 짐을 꾸리고 채우느라 애쓰신다. 더욱 놀라운 것은 르완다와는 일면식도 없으면서 그들의 교육을 돕고자 미디어 기자재와 학교 용품들을 후원해주신다고 물질과 재정으로 발 벗고 나서는 사람들의 헌신과 사랑에 고개 숙여질 뿐이다.
나의 르완다행으로 아내와 아이들도 덩달아 마음이 분주해졌다. 집을 정리하는 문제도 만만찮다.
집을 비워두고 갈 수는 없고, 세를 놓고 가자니 꽉 채워진 살림살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막막하다.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풀 퍼니시 되어있는 집을 구해야 하듯 우리 집에 놓인 티브이와 냉장고 세탁기를 그냥 쓰는 것이다. 우리 살림살이를 그냥 두고, 누군가 모든 상황을 배려하며 잘 이용해서 사는 것이 가장 깔끔한 상황인데, 과연 그렇게 해결할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순순히 와준다는 전제하에서 현지에서 진학할 학교를 알아보고 수속을 밟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국제학교라 해도 영미권의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학비 차이가 몇 배인 것을 보면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영미권이든 유럽 쪽이든 하나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차량도 필요한데, 현지의 차 가격이 상상 이상으로 비싸서 이왕이면 여기에서 컨테이너로 실어 가는 것이 현명하단다. 그렇지만 물류비용만 일만 불이 넘고 봉사단원 신분으로는 현지에 머무는 동안 운전을 할 수 없단다.
새로 차를 구입하려고 신청해 놓은지도 반년이 넘어갔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다. 지금 몰고 있는 차는 운행한 지 10년을 훌쩍 넘겨서 아프리카로 가져가는데 적합하지도 않다. 운행을 한다면 천상 아내가 해야 하는데, 서울에서도 잘 안 하던 것을 낯선 타국에서 한다는 것은 모험일 수 있다.
아무튼 여러 복잡 미묘한 해결 과제를 앞두고도 출국일은 다가오고 있다.
올해 12월 말이라면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이 아니다.
그냥 여기 있지 굳이 왜 거기까지?라는 질문을 던져오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문득, 너무 무모하지 않냐는 반문을 던져보게도 된다.
그러나, 발을 내딛는 것이 가치 있는 결단이라 믿는다.
허준이 교수의 졸업 축사가 떠올랐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도 나를 근신하게 만들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