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월드미션 프론티어 아이티 고등학교에서 영상제작을 강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은 오전 3시간의 이론과 오후 2시간의 실습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수강생은 모두 20여 명으로 평소 영상제작에 관심이 있는 현지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절반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이 학교를 세운 선교단체인 월드미션 프론티어에 속한 르완다, 우간다, 콩고, 탄자니아의 스텦들이었습니다.
제가 한남동의 르완다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가 여러 번 서류 미비로 뺑뺑이를 당하고, 이제는 황열 주사가 평생 한번 접종해도 무방하단 사실을 모른 채 접종한 지 10년이 지나 찾아간 병원에서 헛걸음을 치고서야, 비로소 비행기에 올랐던 것처럼 이웃나라에서 온 스텦들도 그렇게 힘겹게 키갈리에 도착했습니다.
우간다에서라면 배로 빅토리아 호수를 건너와 육로로 하루를 꼬박 고속버스에 시달렸을 것이고, 탄자니아나 콩고 역시 그 광활한 땅덩이를 잇는 부실한 차도를 이용해서 며칠에 걸쳐 도착한 것입니다. 그들은 2주간 학교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숙식했습니다. 저는 현지의 선교사 집에서 방 하나를 빌렸습니다.
월드미션 아이티 고등학교
르완다의 기구한 역사
르완다에서 영상제작 강의를 진행하겠다는 최종 확정은 6개월 전쯤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선교회와의 지속적인 연락으로 나라와 기간, 인원, 강의 날짜 등을 정했고, 거기에 맞춰 강의안과 실습 장비들을 준비해 나갔습니다. 일부의 경비 외에는 자비로 행하는 교육 봉사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가자고 권할 수가 없었습니다. 2주를 비우고 가는 것인데, 그만큼을 감수하라고 말하긴 힘들었습니다. 예상되는 어려움이야 생각할수록 끝이 없지만 그냥 혼자서 용기를 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도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케냐를 거쳐 우간다와 르완다, 콩고, 탄자니아 땅을 밟았습니다. 선교단체를 따라 필드트립을 겸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40여 일의 시간을 아프리카 대륙에서 보냈습니다.
해발 1500 ~20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한 르완다는 1000여 개의 언덕이 펼쳐진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1994년에 벌어진 종족 간 살육의 아픔과 상처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0년이 지난 2003년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피비린내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국회의사당 외벽에는 선명하게 포탄 자국이 남겨져 있었고, 제노사이드로 얼룩진 가톨릭 교회당 건물에는 그날의 혼란으로 주인을 잃은 신발과 옷가지, 성경책이 뒤죽박죽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급히 수습했던 유해와 뼈들로 채워진 부댓자루들을 너무도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때 맡았던 피비린내의 역겨움은 아마 평생 지워낼 수 없을 듯합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의 추념관이 세워져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방치한 아픔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 머나먼 타국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UN의 이름으로 또는 NGO나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그곳에 와 있는 사람들이 제게는 너무도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습니다. 과거 제국주의가 침략하고 자본가들이 이윤을 따라서 온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의 사람들은 숭고한 뜻이 아니고는 행하기 힘든 결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섬김을 위해 오신 분들을 카메라로 담아 내면서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이다음에 내가 이곳에 올 때에는 나도 그들처럼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서겠노라고......'
아프리카 르완다
2003년을 인연으로 2년에 한 번 꼴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사하라 이남'이라 밝히는 이유는 아프리카 대륙은 50여 개가 넘는 나라로 구성되어 있고, 통상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는 아랍 세계의 일부라 할 수 있는 북아프리카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르완다는 참으로 복잡한 역사와 세계사의 역학관계 속에 놓여 있는 나라입니다. 1800년대 말에는 독일의 식민지하에 있다가 1차 대전을 끝낸 1900년대 초반에는 벨기에의 통치하에 놓입니다. 언어는 자연스럽게 벨기에가 사용하는 불어가 공용어였습니다. 그러다 불어권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2007년엔 공용어를 영어로 바꿔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목축업에 종사하던 투치족이 소수이면서 부를 쥐고 있었다면 후투족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투치족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유럽 제국주의는 이들의 종족과 표식을 명확히 구분하고 식민지배의 파트너로서 투치족을 앞세워 후투족을 통치해 왔으니, 유럽에서 독립한 1960년대 아프리카는 대체로 종족 간의 대립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총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 득세하고 나머지는 반군으로 전락해서 주변국으로 떠밀리고 다시 세력을 키워서 정권을 잡으려 시도합니다. 이를 지원하는 종족과 나라와 열강이 배후에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엄청난 지하자원과 석유 및 희귀 광물 자원 등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죠. 이런 종족 간의 살벌한 살육으로 몇십 만의 이웃들이 하루아침에 서로를 죽고 죽이며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2003년과 몇몇 해에는 나라의 국경을 오가거나 반군의 거점이 있는 지역을 통과할 때에는 헬멧을 쓰고 UN 평화유지군 차량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르완다와 콩고, 우간다, 부룬디 접경지역에는 전쟁을 피해서 모여든 난민촌이 세워졌는데, 이곳에는 UNDP(유엔 개발계획)나 UNHCR(유엔 난민기구)의 지원과 통제하에 긴급 지원된 천막에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급조된 지역과 시설에는 항상 식량이 문제였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위생시설과 급수, 의복 조달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밤이 되면 전기가 없는 어둠 속의 무정부 상태가 되어 평화유지군도 날이 저물기 전에 퇴각했다가 날이 밝아서야 난민 캠프로 들어왔습니다.
Mahama Refugee Camp in Rwanda. Photo by Caritas by caritas
난민캠프에서의 삶은 여자와 노약자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난민캠프를 촬영하면서 그 열악함을 생생히 보았고 다큐로 기록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먹을 거라도 나누어 주고 싶었지만, 그 많은 인원에게 다 줄 수 있는 물량도 안 되거니와 잘못하면 사람이 몰려 와 위험에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엄중한 경고를 받은 터였습니다.
그곳에도 학교로 지어진 천막이 있었고, 그 공간에 빼곡히 들어찬 아프리카 아이들의 빛나는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배고프지만 배움에 더 굶주린 찬란하고 초롱한 눈빛을 보는 순간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갈급한 자에게 물을, 지혜를 간구하는 자에게 책을,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그때의 빚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내게 있는 지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회가 주워지기를 바랐습니다.
드디어 강의실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났고, 서로를 소개하며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가졌습니다.
노트북에 연결한 프로젝트로 PPT 자료와 영상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려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