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은 달빛에 물들고

2006~2008년 북한 관련 다큐 제작기 3 / 사진:한겨레신문

by 준구

일요일 오전

예배드리기 원하는 일행의 요청에 따라 북측은 우리를 교회로 데려다주었습니다.

도착한 곳은 평양의 칠골교회. 아담한 규모의 예배당이었습니다.

남한의 여느 교회처럼 한쪽에는 성가대석이 자리하고 있었고 강대상과 장의자가 놓여있었습니다. 북한의 성도들은 장의자에 자리하고 앉았는데 여 성도들은 대체로 한복을 남성은 단정한 양복을 차려입었습니다. 익숙한 찬송을 시작으로 함께 찬양을 하는데, 신선한 떨림이 일었습니다. 예배당의 울림이 가슴에는 더한 먹먹함으로 전해졌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성가대의 남. 녀 단원들이 찬양을 불러주었는데, 합창의 화음이 은혜롭게 퍼졌습니다. 약 이백 여명이 빽빽이 들어찬 예배당은 북한 현지인들과 우리 남한 사람들 그리고 외국인 예배자들로 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외부인들이 늘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는지 북한 사람들도 우리를 자연스럽게 대했습니다. 한때는 한반도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어지던 곳이 평양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 보면서 마음을 모아 북한 목사님의 설교에 집중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세계 어느 교회에서나 들을 수 있는 성경에 기반한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남한의 교회에서 선포되었어도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러나 말씀 속에서 약간 미묘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하나님의 자리에 북한의 지도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뉘앙스가 느껴졌습니다. 평양 외의 지역에는 드러나지 않게 숨어서 예배드리는 북한 성도들의 어려움을 들었던 터라 이 사회에서의 종교가 어떤 의미인지 고민스러웠습니다.

북한의 대표적인 교회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측의 표현에 의하면 ‘한때는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이 수없이 많고 화려했는데, 미국이 폭격해서 자신들이 지어놓은 걸 파괴했으니 이젠 더 이상 교회를 세울 필요를 못 느낀다’ 고 말합니다.

예배가 마무리될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으로 나가 특송을 했습니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의 총장을 지내셨던 김진경 교수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지어 함께 가르치는 외국인 교수들과 참석했습니다.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 온 교수들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마음가짐에 대해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북한의 과학 인재 양성에 힘쓰는 것은 이 교육을 통해서 이념과 체제를 넘어 인류애와 평화를 가꾸고자 함이니 함께 마음을 모아 달라는 당부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는 참석했던 사람들과 잠시 환담을 나누고 인사했습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대동강이 굽어 보이는 만경대였습니다.

당시에는 장소와 위치를 잘 모르고 움직였지만 지금은 구글 지도로 찾아보니 그곳의 사진까지도 나와서 참으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만경대는 김일성의 고향집이라 북한 주민의 관람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남한에서 같은 시기에 방북한 고향방문단들과도 동선이 겹쳐 뜻하지 않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모가 북의 애국열사묘에 안장되어있는 후손들은 이번 방북이 실로 큰 감회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묘역에는 큰 비석에 존함과 얼굴이 함께 새겨져 있었는데 김규식, 조소앙 등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던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의 지도자들이, 이제는 남과 북으로 뿔뿔이 나뉘어 서로가 자유롭게 찾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한층 가슴이 아립니다. 그래도 고향방문단에 선정된 사람들은 이곳에서 선대 어른들을 만나는 감격에 기쁨에 찬 눈물을 떨굽니다. 마치 여운형의 자제들이 북한의 대표로 남한을 방문했다가 우이동에 모셔진 선친의 묘소를 둘러보았던 것과 동일한 깊은 감상에 젖어서.........

서울에서 함께 온 언론사 기자들은 부모님을 찾아서 성묘하는 방문단원을 촬영하느라 분주했고 저는 잠시 관람객의 입장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차창을 내다보니 보통강가에 정박된 푸에블로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동승한 안내원이 배와 관련된 설명을 잠시 해주는 사이 나의 뇌리에는 만약 ~ 이러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역사적 가설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186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 대동강에 나타났던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를 맞아 조선이 문호를 개방했다면, 1968년의 저 배가 지금 저 자리에서 북의 전리품처럼 묶여있지는 않았을 텐데’......

대동강과 평양시내 by pixabay


저녁은 숙소인 양각도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식당이었습니다.

47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엔 중국인과 외국인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우리도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며칠을 함께 한 북측 사람들과도 제법 잔잔한 정이 들고 막역한 대화도 오갔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체크하는 카메라 촬영분에 대한 통제가 소홀해진 것은 아니었고, 다만 찍는 것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어진 상황이었습니다. 레스토랑의 음식 맛이나 분위기가 좋았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야가 확 트여서 넓었습니다. 턴테이블에 얹힌 레스토랑이 천천히 회전하며 사방팔방의 전망을 천천히 바꿔가며 보여주었습니다. 난생처음 경험한 회전 레스토랑이 다른 곳도 아닌 북한의 평양이라니.......

옆에 앉아 있던 북한 안내원과 보위부 직원과도 속 깊은 대화도 주고받았습니다.

중국의 북한 접경지나 러시아에서 만났던 북한 동포들은 남한의 사정에 밝았습니다. 남한은 이미 상당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고, 여러 방면에서 북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만 그렇게 인식하는 게 아니고 대체로 북한 주민들의 인식이 그러하다고 전했습니다. 전처럼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닌 동포애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힘겨워하는 북한을 도와달라고 호소할 때는 마음 한편이 아렸습니다. 샘의료재단이 압록강 접경에서 왕진가방에 약품과 식료품을 북에 전하는 과정에서 만나고 목격한 바였습니다. 절실함과 절박함이었습니다.

소비에트 연합체계가 붕괴되면서 북한은 심한 경제난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우정을 변치 않는 중국의 도움이 있지만, 중국은 그만큼의 대가로 북한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반대급부로 취하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중국에 대해서 결코 좋은 감정만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웃지만 어쩔 수 없이 아쉬워서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인.

평양지역 바깥의 사람들을 만나보았기에 저는 나이나 직위상으로 높아 보이는 보위부 직원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해방 이후에 북한은 전력 사항을 비롯한 사회인프라나 농지개혁 등에서 앞선 측면이 많았는데 왜 지금의 상황은 이렇게 힘겹습니까?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간혹 듣는 얘기는 '1960년대엔 북한에서 의료지원도 해주고 의사들도 보내주어서 자기들을 돕더니 이제는 남한에서 많은 도움을 준다며 north and south Korea 최고' 라고 칭찬을 들었는데, 북은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거냐고 물었습니다.


쉽지 않은 대답이고, 구체적인 답을 듣고자 던진 질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상과 이념에 맞게, 적어도 백성들을 배고프게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애정 어린 질타 내지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도 “이 선생”하며 나를 나직하게 부르더니, 이내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깊이 빨아들이고 뱉어내는 거친 숨소리에 연기만 자욱이 피어올랐습니다.

나의 어깨에 지긋이 올려진 그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한동안 불 꺼진 평양 시내만 내려다볼 뿐이었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휘황한 서울의 밤거리를 걷게 될 것입니다.

대동강엔 달이 밝아 오는데 가슴속엔 말할 수 없는 애절함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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