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가을,
저는 “새누리좋은사람들 “을 중심으로 한 스텝들과 고려항공에 올랐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중국을 경유해서 평양의 순안공항으로 향했습니다.
NGO 담당자와 의료전문가 서울시 대북지원 담당자가 함께한 10여 명의 방문이었습니다.
모두의 얼굴에는 약간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고, 여러 번 오고 갔던 담당자만이 덤덤하게 행동했습니다. 기내에서 마주한 여승무원은 단아한 옷매무세와 미소로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라며 특유의 씩씩함으로 우리를 환대해 주었습니다. 간식으로 내주는 음료와 곽밥을 받아서 먹는 사이에 비행기는 평양의 상공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창가를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촬영팀은 저 혼자였기 때문에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상황을 포착해야만 했습니다. 이럴 때면 동영상에 집중하게 되어 스틸샷을 찍을 시간이 없음이 늘 아쉽습니다. 상황은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면 놓치게 됩니다. 순안 공항에 비행기가 멈추자 한눈에 공항 건물과 중앙에 걸린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천안문 광장의 자금성 중앙에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처럼.
‘아! 이곳이 TV로만 보아왔던 북한이로구나’
평양 순안 공항
남과 북으로 나뉘기 전에는
조선의 팔도 중 하나였고, 고려의 주 무대이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구가했었을 우리의 강토.
순안공항에는 우리를 기다리던 소형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북측에서 나온 여러 명의 안내원과 지도원 담당자 등이 동승했습니다. 카메라를 든 나에게는 당연히 북한의 보위부 직원이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습니다. 허락된 공간과 장소가 아니면 촬영하지 말 것과 혹시라도 이상한 것을 찍었을 경우 내용 확인 후 삭제 및 압수가 가능하다는 어름 짱을 놓았습니다. 당신들의 땅이니 이곳의 룰을 따르겠지만 나는 나대로 담아야 할 내용은 소신껏 찍겠다는 야릇한 근성이 일었습니다. 공항에서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한산한 시골길을 달리는 느낌이었고 간간히 보이는 검붉은 색의 표어와 슬로우건이 생경하고도 또렷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평양에 위치한 조선종양연구소로 향했습니다.
병원시설을 둘러보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의료기기도 미리 보내었으니 잘 사용되고 있는지도 체크해봐야 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진료를 위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대기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의복이 다른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서로가 신기한 눈빛과 반가운 눈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북한 의사들의 안내로 수술실과 연구실의 구석구석을 안내받았습니다. 수술실에는 수술 등과 마취 기계 등이 놓여있는데 마취장비는 1974년 산 체코슬로바키아 제로 아직도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낡아 보였습니다. 수술 등도 외국 램프를 써야 하는데 전구 하나의 값이 너무 비싸서 북한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바꿔 쓴다고 하면서 전력사정이 안 좋아서 조도가 상당히 낮다고 말합니다. 냉난방기가 달려있지만 역시 전력 공급이 잘 안 되어 여름과 겨울에 사용을 못하고 있다고 어렵게 고백했습니다. 이런 열악한 시설에서 일 년에 600~1000건의 수술을 했다는 말에 함께했던 남측 의사가 혀를 내둘렀습니다.
수술실에서 더위와 추위에 싸워가며 수술을 감행한다는 것은 의료진에게도 엄청난 고역이며 바꿔 말하면 사명감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서울에서 미리 보내준 유방암 진단기계는 정밀도가 높아서 북측 의사들이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충분한 전기와 불안정한 전압으로 인해서 잦은 고장이 발생하고 있었고, 물자 부족으로 인한 X ray 필름 부족과 현상 장치 부족 등 그야말로 인프라 부족의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등 제3세계가 안고 있는 그 사회에 맞는 적정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송국이나 의료기관은 만약의 사태에 전력이 끊긴다는 가정하에도 자가발전을 통해 전원을 공급하는 장치를 갖추는 것이 상식인데, 그런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병원시설 개선을 도와야 할지 실무자들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나사에서 촬영한 한반도 2014년그날 밤
양각도 호텔로 돌아와 바라보았던 평양의 야경은 거대한 도시가 어떻게 이렇게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일 수 있을까 놀라웠습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경험했던 그 깜깜함을 수도인 평양에서 맞이하다니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몇몇 차량이 발산하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긴 꼬리를 내뿜고 깊은 밤의 흔적처럼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한강의 여의도처럼 양각도는 대동강 사이에 떠 있는 섬입니다. 양각도 호텔은 그 섬에 우뚝 세워진 현대식 호텔이었습니다. 맞은편으로 평양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뒤로는 간이 골프코스가 보입니다. 며칠을 묵으며 대동강가로 잠시 산책도 나갔습니다. 초록빛 강물이 잔잔하니 아름다웠고 몇몇은 낚싯대를 드리워 고기를 잡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우리는 주로 전용 버스로 병원 등을 오가며 지속적인 회의와 모니터링을 이어갔고 이런저런 곳으로 안내받았습니다. 한 번은 단고기집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둥그런 원탁에는 늘 물과 소주와 포도주 대동강 맥주 등이 놓여있었고 간단한 축배를 들어 식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단고기는 부위별로 조금씩 접시에 세팅되어 각 개인에게 배달되었습니다. 이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았던 우리 일행 중의 하나도 맛나게 차려진 아름다움에 반해서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각 부위별로 요리해서 나오는 음식은 빛깔도 다르지만 입에 살살 녹는 것이 생전 처음 접하는 맛이었습니다. 물론 평양냉면도 사리 위에 각양의 고명이 놓이고 남쪽에서는 맛본 것과는 다른 풍미를 느꼈지만, 단고기를 다양하게 요리하며 디스플레이한 것은 지금도 가끔 생각납니다.
대동강맥주 맛을 보고는 사실 좀 놀랬습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마셔보았던 그런 풍미와 깊이가 느껴져서 의아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은 북한이 2000년 180년 전통의 영국 양조장을 인수했고, 양조기를 분해한 부품을 옮겨와서 대동강맥주공장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협의를 마치고 시간이 남을 때에는
간간히 시내를 관광시켜주었습니다. 우리를 전담했던 안내원과 보위부 사람과도 제법 친해져서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고 곤란한 질문도 던져보았습니다. 밤에 본 평양과 낮의 모습은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TV로 보아서 눈에 익숙했던 김일성광장을 둘러보았습니다. 2006년의 평양 느낌은 마치 1980년대의 대한민국 여의도 광장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났습니다. 아니 중국의 지방도시 같기도 하고 러시아식 회색 콘크리트 느낌도 일었습니다. 그 모니터로만 익숙한 이미지가 내 앞에 펼쳐진 시공간과 후각으로 놓인 것이 비현실적인 몽롱함 같았습니다. 평양의 시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스피커와 함께 환청처럼 들려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춤을 연습하고 발을 맞춰 행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체사상 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에 오릅니다. 남산 타워에서 내려보는 것처럼 150여 미터 높이에서 평양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탑을 세울 때 여러 나라에서 보내왔다는 석판이 유명 사찰의 기와 불사처럼 여기저기 눈에 띄었습니다.
외교단지에도 들렀는데 유럽의 여러 나라와 아프리카 국가 및 국제기구가 눈에 띄어 좀 놀랐습니다. 북한도 많은 나라와 수교해서 외교관과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보았기에 조금의 안도가 느껴졌습니다. 중국과 러시아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몽골을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다시금 한반도가 쉽사리 전운에 휩싸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전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양각도 호텔에서 바라본 평양거리에선
평화자동차의 간판이 눈에 띄고 그곳에서 생산한 뻐꾸기와 휘파람이라는 상품의 차량이 보였습니다. 평화자동차는 통일교에서 북한에 공장을 세우고 이탈리아와 협력으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중이었고 현대자동차도 제법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검은색의 오래된 벤츠가 풍기는 가오는 여기서도 먹어주는 분위기 같았습니다. 지금은 조성이 완료된 여명 거리였었는지, 제법 긴 구간의 블록에서는 고층의 아파트 건설이 진행 중이었고, 평양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던 유경호텔은 102층의 골조만이 앙상한 채 건축이 멈춰진 상태였습니다. 저녁 무렵에는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많은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때로는 걷고 있는 무리의 사람들. 확연히 평양은 중국의 국경과 변두리에서 보았던 북한의 살림살이보다는 나아 보였습니다. 금강산 부근에서 보았던 목탄차도 보이지 않았고 1970년대에나 살았을 법한 가옥들도 드물게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6시 이후엔 단전으로 작동되지 않는 엘리베이터 놓치지 않기 위함은 아닌지, 우리와 동행하는 안내원은 20층을 상회하는 평양의 고층아파트에서 산다는데 그는 우리와의 저녁을 마치고 무사히 23층에 위치한 그의 집까지 잘 걸어 올라갔을지 막연한 걱정이 일었습니다.
우리의 숙소인 양각도 호텔의 객실에서 평양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일행들과 환담을 주고받다 엉겁결에 “욕실에 타월이 부족한데”라고 외쳤는데, 1분도 지나지 않아서 객실 서비스로 타월과 물이 배달된 것은 우리도 끝끝내 풀지 못한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숙박객에 대한 당연한 환대와 서비스였는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인지......
어쨌든 인터폰 사용 없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준 호의에 놀라워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일요일의 휴식엔 우릴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해보면서.
https://www.youtube.com/watch?v=U1QasFEIFvE MBC다큐-평양의대 개안수술 5일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