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구 Apr 29. 2020

지성인의 품격

예술인 와타나베

와타나베 부부는 우리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

코네티컷주의 뉴헤이븐이란 도시는 예일 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연구 기관들이 모여있는 대학 도시인데, 우리가 기거하던 OMSC (overseas ministries studies center)는 예일대학의 신학부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두 동의 아파트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물론 남미와 미국 각지에서 온 그리스도인이 함께 살았다. 미국인을 제하면 대체로 해외 선교사나 목회자 평신도 사역자 등이 주를 이뤘고, 안식년을 맞은 이들이 길게는 1년가량을 머무는 곳이었다. OMSC는 매주마다 주제를 달리하며 세미나를 열었고, 이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서 방문했다. 단지 내에 기거하는 사람들만 온전히 1년을 함께 살아가며 같은 클래스에서 공부했다. OMSC에는 수녀님도 계셨고, 그리스 정교 신부도 살았으며 팔레스타인에서 피난 나온 기독교인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각자 소개할 때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종파가 이렇게 많고 다양하다는 사실에 자뭇 놀랐다. 그때 나는 40대에 접어들었고, 동갑인 아내 역시 쉼 없는 한국에서의 노동에 지쳐 모든 것을 중단하고 자발적 안식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온 것이었다. 그 해가 2008년이었고 나와 아내와 꼬마 아들은 그렇게 뉴헤이븐에서 천국 같은 1년간의 휴식에 들어간 것이다.  

  

예일 대학과 대학주변을 다니는 학교버스


OMSC의 수업은 이런 식이다.

“리더십 leadership”이 그 주의 주제라면 월요일 오전에 시작한 강의는 금요일 오전까지 5일간 지속된다. 점심을 제외하면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의 분량으로 수업이 진행되어 교수가 책 한 권의 분량을 일주일간 가르친다고 보면 맞다. 읽어야 할 책 분량도 있고, 강의 중에는 사람들의 질문도 많은데, 그룹 토론도 자주 진행되다 보니 목요일엔 초가 되고, 금요일이면 그야말로 손꼽아 기다리던 TGIF (thank god it's frieday)를 경험한다. 금요일 오후부터 사람들은 산과 들과 바다와 다운타운으로 나가 정신없이 자유를 만끽하곤 했었다. 드넓은 미국에서 차 없이 지낸다는 것은 상당한 제약이지만 우리는 예일대학을 순환하는 블루 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고, 공동 차량인 벤을 이용해서 장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소이치 와타나베는 일본 사람으로 나보다 20살이 위인 60대의 예술가다.

OMSC가 와타나베 부부를 초청한 이유는 1년간 미술작품 활동을 지원해서 기독교 미술품을 제작하게 하는 데 있었다. 부부에게는 넓은 작업공간이 주워졌고 각종 미술도구와 화판들이 제공되었다. 다른 거주자들과는 또 다른 관리와 케어의 대상이었다.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역자들이어서 OMSC가 이들의 생활을 후원했다. 당연히 가족 전체가 온 사람들은 없었다. 우리나라같이 경제력이 높은 나라의 사람들만 예외적으로 주거비를 내야 했다. 다소의 비용이 더 들어가기는 했지만, 온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기도 했다. 가족이 있으면 자녀를 보육시설에 보내고 학교에 픽업도 해주어야 하니 차량 하나는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우리도 주변 지인의 도움을 받아 몇 천불을 들여 made in korea 산 중고차를 장만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한때는 세계경영을 외치던 회사가 만든 10년이 넘어  오래되고 낡은 자동차였다. 한겨울 눈 덮인 도로 위에서 엔진이 멈추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케 한 차량이지만, 때론 1000 키로가 넘는 캐나다의 토론토 여행을 무리 없이 마치게 해 준 차이기도 했다. 몇 차례의 주말을 보내고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과도 자연스레 친해졌고, 우리 차량은 이들의 발이 되기도 했다. 함께 놀러 다니고 음악회와 박물관도 다녔다.

그때 예일대학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한국분이어서 큰 공연이 있을 때마다 뿌듯한 마음으로 연주를 감상했다. 음대에는 한국의 유학생들이 많았고, 교회에서 보았던 청년들도 눈에 띄었다. 예일대학은 학부에 음대가 없고 대학원에 음대가 있는데, 대부호인 기부자가 음대생의 학비 수십 년 치 거액을 미리 대학에 지불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비를 면제받는 특혜를 입었다. 대신, 학생들은 장학금의 후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역민에게 수준 높은 공연으로 보답한다. 그래서 대학 곳곳에서 크고 작은 음악회와 공연이 늘 열렸다. 주중 정오 음악회, 주말 연주회, 월 단위의 공연은 일상에서 맛보는 풍요로운 문화생활이었다.     


한 번은 주말을 맞아 맨해튼의 미술관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일찍 출발하면 구겐하임 미술관과 센트럴 파크를 둘러보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와 아들을 태워도 두 자리가 남으니 아무래도 화가인 와타나베 부부가 맘에 걸려 같이 가겠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화색을 띄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내내 가고 싶었었는데 기차를 타기도 그렇고 막연해서 시간만 보내던 터라고 했다. 오고 가는 자동차 안에서 우리는 제법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외국인들이 공용어인 타국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엔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래도 아시아적 정서와 문화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맨해튼의 주차난과 비싼 주차료를 피해 미리 물색한 건물에 파킹하고 미술관을 향해 걸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건축적인 아름다움을 음미하며 원형 전시관을 따라 상층부로 오르며 미술품을 관람했다. 건성건성 건너뛰는 우리의 발걸음과는 달리 와타나베 부부의 눈빛은 사뭇 다름이 느껴졌다. 완상과 스킵에도 어떤 의미가 담긴 듯 보였다. 미술관을 샅샅이 도느라 피곤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늦은 점심으로 기운을 차려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느리게 천천히 숲길을 따라 걸으며 도심 한가운데 녹음이 우거진 공원의 한가로움을 즐겼다. 꽉 찬 하루를 보람되게 보내었음을 감사하며 다시 뉴헤이븐으로 발길을 옮겼다. 확 트인 도로에서 바라보는 드 넓은 대지와 바다와 하늘빛에 흡족해하며 집에 도착했다. 즐거운 여행에 초대해준 것에 깊이 고마워하며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와타나베 부부와는 그날 이후 더욱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서 여러 가정이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던 때였다.

각 가정에서 한 가지씩 음식을 준비해서 함께 식사하는 포트락 Potluck이 일상이어서 그때도 그렇게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다른 가정이 다 돌아갔는데 와타나베 부부는 조금 더 머물다, 갑자기 우리 부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고 놀라며 그의 음성에 주목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과거 우리 선조가 아시아와 한국에 행했던 만행에 대해서 정중하게 사과
드립니다. 용서를 구하니 사과를 받아 주십시오. 정말 잘못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순간 너무도 당황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 잘 지내왔고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과거는 그냥 지나간 일일 뿐인데, 과거의 침략을 마치 자신이 행한 일인 양 거듭 사죄하며 무릎 꿇어 머리를 조아리다니.......’

우리는 바로 그 예술가 부부를 일으켜 세웠지만, 그날의 광경은 내내 강한 충격으로 남았다.

'침략과 만행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 자기 선조들이 벌인 일인데, 그것을 대신해서 사죄하는 용기는 어떤 역사관을 갖은것이기에 가능하단 말인가? '  

  

‘저런 자세가 지성인의 품격인가?’

‘일본 정치인들 중에선 저런 역사인식을 갖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닌 세계 시민의 가치와 인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깊이와 넓이가 어디에 다다르는지 잘 알지 못한다.


'우치무라 간조와 같은 신앙의 사람인가?'

소이치 와타나베의 그림을 보면 더욱 숙연해질 뿐이다.      

 



와타나베의 작품


이전 12화 나의 선생님은 오늘 안녕하실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