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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구 Feb 21. 2021

1000 키로를 달려 졸업식에 참석했던 날

졸음 참기

오늘 나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졸업식을 온라인으로 중계했어.

코로나의 엄중한 시기라 학교는 썰렁했고 학위 수여를 받는 소수의 학생만이 눈에 띄었지.

대강당도 아닌 소강당에서 교수와 학생 몇 명만이 참여한 행사였어.

멋진 졸업가운을 입고 축하 꽃다발을 받으며 가족에 둘러싸여 행복해야 할 졸업생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거야. 상을 받는 학생의 수상과 단과대 교수와 총장의 간략한 축사로 모든 식순이 끝난 거야. 웅성대며 축하하는 축하객도, 손에 가득해야 할 꽃다발도, 긴 꼬리를 무는 차량의 행렬도 없는 밋밋한 졸업식이었지. 30분도 안 되는 행사를 마치고 나니 심한 허탈감이 밀려왔고, 너의 졸업식이 생각나더라.


20095월이었던가?

미시간에서 열리는 너의 졸업식을 앞두고 너의 아빠와 엄마는 무척 대견하고 흐뭇했었나봐.

나와 우리 가족들도 함께 참석하자고 권했으니 말이야. 나도 미국 대학의 졸업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어. 때때로 애플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나와서 멋진 연설을 해주기도 하는

문화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거든. 그때 너의 아빠는 큰 밴을 가지고 있어서 집인 코네티컷 그리니치에서 미시간을 운전해서 가려고 했나봐. 비행기로 가면 금방일 텐데 졸업식 전날까지 일을 해야 하는 너희 엄마 아빠의 사정으로 그냥 운전해서 가는 것으로 정리했지.


너희 학교까지는 650마일.

키로로 따지면 1000킬로 미터가 넘는 거리였어.

서울 부산이 500킬로라 하루거리 500을 맥시멈으로 알고 살았던 나로서는 꽤 놀라운 거리였지. 바꿔 말하면 한반도의 남단에서 북단까지의 거리를 밤새 차를 몰아가겠다는 것이었으니까. 미국으로 옮겨간 이민 1세대의 부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저녁 9시쯤 출발한 밴은 고속도로를 무섭게 밟고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면서 9시간쯤을 달렸던 것 같아. 뒷 자석에 앉았던 형수님과 아내랑 아이는 이미 곯아떨어지고 운전을 맡은 네 아빠도 순간순간 떨어지는 고개를 어찌할 줄 몰라했지. 조수석에 앉은 나 역시 바짝 긴장하며 졸린 눈을 비비느라 몸부림쳤어.

    

새벽 동틀 무렵 겨우 도착한 미시간 앤 하버의 네 숙소에서 우리는 1시간 남짓의 쪽잠을 잤는데, 그것도 너의 룸메이트들이 졸업식 준비로 부산스러워서 우리는 거의 세수만 하고 나왔던 거지.

너의 숙소에서 먼저 나와서 차로 이동하는데 백인 녀석 하나를 만났던 거야.

우리 일행을 보더니 “ 헤이 차이니스 고홈”을 외치더라.

‘저런 미친 백인 놈을 봤나. 백주 대낮에 대놓고 인종차별적 언어를 쏟아내고 미국 시민이 된 너의 부모님을 외모로만 판단하다니’

‘차이나와 코리아도 구별 못하는 무식한 놈이 어디 아시아를 한 무더기로 싸잡아 얕보다니 ‘     

형수님도 화가 나서 막 쏴 붙여 주셨지만, 씁쓸함은 오래갔어.   

   

차를 몰아 졸업식이 열리는 너희 학교 대운동장으로 향했지. 미시간대학의 캠퍼스 타운이 잘 정돈되어 멋졌지만 미식축구장의 스태디움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과 주차시설과 졸업이 곧 축제라는 개념이

신선한 문화의 충격이었다고나 할까.

그라운드와 스태디움에 운집한 사람들이 졸업생의 연설과 축사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며 손뼉 치고 환호해주는 모습이 여유 있어 보이고 격조 있게 느껴지더라.      

그렇게 긴 행사를 마치고 학교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사진 찍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인식당에 갔을 때 네가 말해줬었지. 그 부부의 아들이 대학생이었고 대학 학비에 도움이 되고자 자원입대했다가 이라크전에서 사망했노라고.

그때 네 동생도 부모님께 학비의 부담을 줄이고자 대학에서 ROTC를 지원했었지.

미국서 나고 자란 너희의 마음 씀씀이가 참 대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네가 했던 말들이 기억난다.


“한국의 강남이 어딘데, 그렇게 잘살아요. 여기 유학 온 애들의 씀씀이가 너무 커서 미국 애들도 깜짝깜짝 놀래요.” “목사들이 돈을 잘 벌어요?  한국에서 온 목회자 자녀들이 꽤 많아요.”

“학문에 관심이 없으면 유학을 안와야 되는데, 여기 와서 공부 안 하는 애들이 많아요.”     

그때 네가 궁금하다며 작은 아빠인 내게 쏟아놓던 질문과 의문이 아직 여전히 나의 뇌리에 남아 있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잊히질 않는 건지.    

 

너는 그렇게 대학을 졸업했고, 돈을 모아서 대학원을 진학하고 직장도 얻었지.

교포 2세 신랑도 만나 결혼을 하고 아기도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오늘 우리 대학의 졸업식을 중계하는 현장에 있노라니 10여 년도 넘는 너의 졸업식이

문득 떠올랐지 뭐니. 그날 졸업식을 마치고 너희 학교를 구경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행복한 추억처럼 떠오르네. 여건이 허락했다면 너의 부모님도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하루 정도는 쉬고 여행이라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면 더 좋았을 거야. 그렇지만 이민 1세대의 몸에 밴 근면함과 검소함을 어쩌겠니. 우리야 1년짜리 미국 여행객이었지만, 너의 부모님은 성실함으로 버텨내야 하는 이민자들이었으니까.    

  

다시 1000킬로를 운전해서 돌아오는 밤에는 나도 잠시 형과 교대로 운전을 해야 했지만,

순간적으로 실신하듯 정신을 잃는 아찔함에 등꼴이 오싹 했었어. 서로 졸지 않도록 지켜보고 잠을 참고 운전하는 것은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책임감이었어.

미시간에서 다시 코네티컷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어.


집을 코 앞에 두고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잠시 쉬며 마시던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 하나에

얼마나 큰 위안과 눈물이 솟구치던지.      

이제 다시 미국에서 너희 가족을 만난다면 너무 쫓기듯 살아가는 삶은 멈추라고 말해야겠어.

안단테 안단테.

이제는 좀 삶을 누리면서 살아가도 된다고......       




                                조카의 졸업식에 참석했던 아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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