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우연히 다시 만난 건 지하철 안에서였다.
1983년에 매일 뵙던 분을 7년이 지난 1990년의 어느 시점에서 마주친 것이다. 선생님은 전동차가 지하에서 지상구간으로 나오는 압구정의 한강이 펼쳐지는 바깥을 바라보고 계셨고, 나는 그분이 예전의 스승인지를 재차 확인하며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이 드리워진 각진 머리 스타일은 7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오래전 나의 담임이심을 확신할 때 비로소 등 뒤에서 선생님의 이름을 불렀다.
“박재일 선생님!”
“어! 그래 누구더라?”
“수유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반의 이준구예요.”
“응 그래 반갑다, 준구야. 이제 생각난다.”
선생님과는 2~3 정류장을 함께하며 짧은 안부만 나눈 채 아쉽게 작별했다. 동선이 달라서 금방 내리셨지만 나는 그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학 선생님이셨으면서, 영어 성적이 안 나오면 반 전체를 남겨 영어를 가르치신 분이셨다. 과학시간에는 진도를 나가다가 어느 시점에선 당시의 사회현상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역사에 관해서 언급하기 시작하면 그의 눈빛과 열정은 학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근현대사에 이르면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는 다른 각도와 틀로 새로운 역사의식에 눈뜨게 했다. 그분은 해박함과 젠틀함을 갖추셨고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다. 한마디로 스승으로서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은 분이셨다.
어떤 때에는 스스로 엄청난 절제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멈추거나 은유로 끝을 맺었다. 학생들에게 아쉬운 여운을 남긴 채 교단에서 내려오곤 하셨지만,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자유롭게 말하지도 못하는 역사가 존재하며, 이를 밝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메이커 신발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범표 신발, 말표 신발을 신던 문화에 갑작스럽게 나이키라는 외국 브랜드가 유입되었다. 국내 브랜드로는 프로스펙스가 그 유일한 대항마로 나타났다. 아디다스도 있었지만 단연코 하얀 무니에 선명한 나이키와 프로스펙스 이니셜은 대세를 이뤘다. 없는 살림살이에도 자녀들의 성화에 못 이겨 거액의 브랜드 신발을 억지춘향 격으로 사야 하는 가정이 늘었다. 신을 빨아서 지붕 위에 말리는 동안 누군가가 훔쳐 가는 일도 종종 생겨났다. 등하교 길에서 신발을 삥 뜯는 일도 벌어졌다. 평준화된 가난에서 갑작스러운 귀족 신발의 등장은 학생들이 처음 경험하는 빈부의 격차였다.
선생님은 종래 시간에 갑작스럽게 신발 검사를 하겠다고 하셨다.
학생들의 신분에 맞게 검소한 신발을 신고 다니라는 가르침에서였다. 분단을 가로지르며 비싼 신발을 신고 있는 학생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60여 명이 조금 넘는 학생 중에서 나이키와 프로스펙스를 신은 학생들이 일으켜 세움을 당했다. 그런데 내 앞을 지나시다 나도 일어서라는 눈짓을 하셨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묘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우쭐한 느낌이랄까? 나는 월드컵을 신고 있었다. 두 브랜드에 비하면 겸손한 신발이었다. 아디다스도 아니고 값비싼 신발도 아니었다. 약간 애매한 웃음이 나왔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10여 명의 아이들이 일어섰고 가급적 학교에 신고 다니는 것은 자제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선생님의 엄격하심과 그 깊은 뜻에 공감하는 동의의 결정이었다. 값비싼 브랜드에 위화감을 느낄세라 그에 준하는 짝퉁도 생겨났다. 작대기 하나가 부족한 아니다스, 나이키와 비슷하지만 다른 나이스, 프로스펙스보다는 획이 하나 부족한 스펙스, 조금 결이 다르지만 조다쉬도 유행했었다.
그날 선생님을 만난 날은 평일의 오전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선생님은 그 시간대에 학교 밖에 나와 있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전교조“가 조직되고 참 교육을 외치는 선생님들을 가차 없이 질질 끌어내어 해산시키던 뉴스로 가득하던 노태우 정부 시절이었다.
그즈음, 나는 선생님이 다소 늦은 나이에 결혼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의 정의로움이라면 당연히 교직원 노동조합의 결성을 주도하셨을 것임은 능히 예측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선생님을 등 뒤에서 부를 때부터 나는 이미 그 안타까운 근심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그냥 평안하게 교직을 이어가시기를 염원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예상과 적중했다. 전교조 선생님들에 대한 대량 해고와 정직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계심도 그와 연관된 상황이었다.
역에서 내릴 때 선생님의 손을 잡고 깊이 고개 숙여 인사드렸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선생님도 멋쩍게 손을 들어 답례했다.
내가 자라면서 만났던 많은 선생님 중에 가슴에 깊이 남아 좌표가 되는 스승들이 계시다. 그분도 그중 한 분이시다. 그 후론 선생님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가 유명인이라면 어떻게 수소문이라도 해서 다시금 찾아뵙고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함도 안타깝다.
그렇지만 한 제자의 인생에 깊이 아로새겨져 여전히 스승으로 살아 계시다는 고백을 드리고 싶다.
간간히 문득 타협하지 않는 그의 진실함이 새록새록 내 삶에서 살아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