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추묘목 고추를 달다
언니집에서 맞이한 아침은 덥지도 춥지도 않고,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기분 좋아지는 날이다.
집밖으로 나서는 순간 웃음이 났다.
텃밭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언니는 상추나 오크를 뜯어 가라고 한다. 상추를 뜯으러 가는데 언니가 '저 고추 따줘야겠다. 너무 커서 다른 것들이 자라지 않겠어'한다. 자연스레 고추묘목으로 눈길이 갔는데 큰 고추가 달렸다고 하기에는 고추묘목이 너무 작았다.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고추묘목 앞에 앉아 언니가 조금 크게 자란 고추를 따는 것을 보면서 그 고추가 문득 없는 집 장남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언니야 그 고추 없는 집 장남같지?하며 웃었다.
작고 여린 고추 묘목, 아직 10cm도 자라지 않은 고추나무에 2-3개의 고추가 달려있고 그 중에 한 개는 특별히 더 자라 진짜 큰 고추만 해져 있다. 그 고추를 보니 옛날 시골의 어느 가난한 집에 똘똘한 맏아들로 태어나 대접은 좀 받았겠지만 책임은 열 배 스무배 많은 맏아들이 떠올랐다. 맏딸 맏아들의 숙명일지도 모르는 운명을 타고난ᆢ 대접이라도 받은 장남은 그래도 좀 낫다. 살림 밑천으로 태어난 첫딸은 대접 받은 일도 없이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집안에서 동생들 챙겨먹이고 씻기고 업어주고 놀아주기를 시작으로 돈 벌 나이가 되면 남의 집 식모로, 공순이로 나가서 시집갈 때까지 번 돈은 몽땅 집에 보내고 자기는 그저 연명이나 할 정도의 돈으로 살아갔다. 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엄마아빠 대신으로 동생들이 놀러오면 친정 다녀가는 것 마냥 집에 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꺼내서 한살림 챙겨준다. 알게 모르게 쳐진 어깨, 힘든 얼굴에 내린 주름이 보여도 내탓은 아닐거야 하고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버리는 동생들이 있다. 때로는 장남 장녀가 아니라도 그 집안을 책임지기도 한다. 내 친구는 16살에 섬유공장에 들어가 낮에는 일하고 밤여는 공부하는 여공 노릇을 시작으로 30살 결혼할 때까지 매달 자신이 먹고살 얼마 안되는 돈만 남기고 집에 다 보냈었다. 언제나 씩씩하고 밝은 그 친구는 시집가기 전에 펑펑 울었다.20년 가까이 돈을 벌어 보냈어도 날 위해 단돈 백만원도 모아두지 않았더라며ᆢ 돈보다는 엄마의 마음이 서운했을 터이고 기계같이 일햏던 자신이 불쌍했을 것이다. 그 옆에서 나도 같이 울어주는 것 밖엔 해줄 것이 없었다.
K장녀, K장남의 무게를 짐작하긴 힘들지만 그들에겐 아마도 착한아이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착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면서 자신을 증명하고 인정받는ᆢ 물론 처음부터 그런건 아닐테지만 서서히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을 진짜라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 아침 작은 고추나무에서 자신을 곧추세우고 당당히 서있는 기상을 보면서 문득 맏딸로 맏언니로 동생들에게 이것저것 퍼주는 언니를 돌아봤다. 못사는 집은 아니였으나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빛나게 사느라 힘이 들었을거다. 간간이 언니가 언니의 모습을 보일 때면 '왜 저래?'했던 나는 이제 언니가 그저 본래의 ㅇㅇ로 편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