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업도의 기억-트라우마에 대하여
얼마전 소모임에서 굴업도 캠핑 공지글을 봤다.나이 60이 넘어서야 캠핑도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참가해 보려는데 지난번 강릉캠핑은 선약이 있어 못갔다. 아쉬운 마음에 잠시라도 들러볼까 싶었지만 그 또한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굴업도를 간다고 한다. 선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선뜻 가겠다고 손을 들지 못했다.
지금 39살이된 아들이 4살 무렵 야간학교 선생님들이 굴업도로 교사연수 다르게 말하면 여행을 갔다. 천주교회 안에 있는 야간학교라 신부님께서도함께 가셨다. 인천에서 덕적도로, 덕적도에서 굴업도로 배를 옮겨타며 가는 길은 신났고 조개캐고. 굴따고 고기잡아 달을 벗삼아 한잔하던 첫날 저녁은 즐겁고 재미있었다.
당ㄷㅁ 날 아침 신부님과 선생님들은 낚시하러 나갔고 나와 아들과 샘 한 명은 바닷가에서 작은 게를 쫒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낚시나갔던 분들이 모두 들어오셨다. 빨리 짐을 싸라는거다. 태풍이 올 것같다고. 다른 배가 있을 때 묶어서 나가야 한다면서. 짐을 싸는 중에 바람도 잦아들고 집안에 있으니 태풍이 올 것같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있어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왕 왔으니 좀더 있자하여 눌러 앉은 것이 낭패였다. 그날 저녁 우리 아들이 어떤 벌레에게 물렸는지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고 아이는 점점 더 크게 울었다. 밖에는 이제 비가 뿌리기 시작했고 모두의 걱정은 커져갔다. 그때 당시 굴업도에는 4가구 7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의료용품도 식품도 넉닉지않은 상황이라 덕적도로 나가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덕적도에서 온 배를 탔고 나와 여선생님과 아들은 배 아래 선실로 들어갔고 나머지 분들은 배 위에 앉았다. 선장님과 선생님들은 무섭게 내리는 비와 몰아치는 파도에 맞서야 했다. 아랏층 선실에 있던 우리는 상황을 알수 없는 암흑 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내 마음 속에선 '신부님도 계신데 하느님이 우릴 어쩌겠어?'하는 생각이 들었다.아들 녀석도 상황을 아는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얼마나 걸렸는지 모른다. 깜깜히ㆍㄴ 어둠과 상황을 모른다는 불안에 두려움은 점점 커지고 제발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소리쳤다. 아이가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수도 있고, 파도에 휩쓸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선실 위로 올라와 선장님만 주시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선장님이 소주 1병을 한 번에 들이키고는 병을 바다로 던졌다. 그 순간 살았구나 싶었다. 잠시 후 배를 대고 내리는데 교장선생님이 "ㅇㅇ줘" 하시는데 아이를 안고 있는 내 팔이 펴지지 않았다. 춥고 무서워 긴장을 많이 했던 탓일게다. 아이를 내 팔에서 쏙 빼서 안고 가시고 우린 모두 공소에 가서 몸을 뉘였다. 그렇게 예기치 않았던 1주일을 덕적도에서 보냈다.
이 에피소드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모이기만 하면 한 번씩 이야기가 되어지고 지금은 돌아가신 신부님께선 "그날 ㅇㅇ이가 있어 우리가 살았다"고 하셨다. 몇십년 우려 먹을만큼 강력하고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되며 잊을수도 없는 일이다.
이 기억으로 굴업도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손을 들까 하다가도 나의 굴업도에서의 경험이 다시 일어날까봐 감히 손을 들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도 트라우마일까? 나와 내 주변에 좋지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대고 있으니 말이다. 매번 그 이야기로 두려움이 희석되어 갔지만 여전히 남아있으니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