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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Jul 20. 2023

나의 결혼일지 06 - 비밀에 관하여

쉿, 여긴 나만의 공간이야



겹겹이 얇고 세심하게 쌓은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사람이란 여러 세계로 이루어진 다면다층적인 존재라

그 누구도 직사각형으로 반듯이 잘린

브라우니 조각처럼 정직하고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한 면만 보고 누군가를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것처럼 오만한 일도 없겠지만 나는 자주 그런 실수를 한다.


내가 판단한 기준으로 예측하고, 예상과 어긋나면 몹시 배신감을 느꼈다. 넌 이런 애 아니었냐며.

그런 실수는, 뒤집어 생각하면 상대를 쉽게 착각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난 이런 애라고.


나는 남자친구에게(미래의 남편에게) 화목한 가정에서

티 없이 자란 밝고 건강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랐다(구남자친구이자 현남편의 이상형).


'가족'이라는 나무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이 가지, 저 가지를 쳐내고 어느 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왼쪽 나뭇가지는 듬성듬성한 반면에 오른쪽 나뭇가지에는 잎이 풍성하게 남아 있다면 그 부분만 줌인하는 것.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SNS 가족 단톡방의 웃긴 대화 일면을 캡처해서 보여준다거나, 잘 보이고 싶은 누구 앞에서 사랑해, 를 연발하며 통화를 한다거나,

행복했던 가족여행 추억을 좀 더 사랑스럽게 이야기한다거나, 등등.


숨긴다기보다는···강조하는 거랄까, 불필요한 부분은 슬쩍 가리는 식으로 얼마든지 비밀을 만들고 지키는 게 가능해 보였다. 아쉽게도 내가 철저히 지키고 싶었던 비밀은 연애할 때까지만 새어나가지 않았지 그 뒤로는(한숨)···.


비밀을 틀켜쥔 쪽은 늘 전전긍긍하게 마련이다. 내가 남자친구가(남편이) 생각하는, 남자친구의 이상형에 맞는, '아무 흠 없이 해사한' 사람이 아니라는 부채감은 사기 결혼이라도 하는 것처럼 늘 나를 괴롭혔다.


이렇게 우울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 틀림없이 실망하겠지, 괴로웠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눈을 뜨면 별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각종 극단적인 방법을 떠올리며 출근하곤 했는데,

그게 모닝 루틴이라서, 글쎄, 누구나 출근하는 시간이면 그러는 줄 알았지)


우울한 것도 밝은 것도, 모두 나를 이루는 다양한 레이어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해서 내가 '부정적임'으로 빼곡히 채워진 적신호 인간이 되는 건 아닌데.


남자친구는(남편은) 나라면 비밀이라고 생각해서 절대 말하지 못할 법한 일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슬펐던 일도, 걱정하고 있는 일도 내게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럴 때면 어쩔 줄 몰라서 허둥대는 쪽은 나였다.


왜 이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거지?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건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럴 때면 그가 이야기한 비밀을(남편은 비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가진 비밀과 비교해 보면서 무엇이 더 나쁜지, 그렇다면 내가 이해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심각하게 고민했다.


저렇게 생각했던 건 무조건 내 고통이 네 것보다 더 크고 중하다, 는 역시나 오만한 생각에서 기인한 건데

각자가 겪은 삶의 고통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겠나······.

(빈곤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볼 때 내 고민이 하찮은 건 말해 뭐 해)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온, 과거시험 보러 가다가 나 좀 봐달라는 병자들에게 붙잡힌 허준이 그랬잖아.

남의 중병보다 제 발의 티눈이 더 아프고 커 보이는 법이라고, 그러니 누군 돌보고 누군 안 돌볼 수 없다고.


(이건 이 이야기에서 정말 쓸데없는 논외인데···저 때 허준이 알려준 티눈 제거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의 19호실을 지키는 일은 그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이해받기 어렵다는 것을 감수해야 하고

각종 오해가 쌓이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방문을 열지 않은 채로, '내가 이런저런 방에 사는데, 절대 들어오지는 말고. 방 예쁘지? 나 거기서 잘 살고 있어.' 라고 한다면 상대의 쓸데없는 상상력만 자극할 수 있잖아.


내 경우에는 상대방과의 심리적 안전거리를 점점 좁히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이 열리는 과정에서,

-물론 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이 90%이긴 했지만-상대에 대한 신뢰와 내게 보여준 다정함 때문에,

그래서 나만의 비밀이었던 것 중 어느 정도는 털어놓았고 상당히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졌다.


언제나 기승전결에서 '결'이 뭔지 알 수 없는 이 글에서, 얼렁뚱땅 결론을 내보자면, 부부라도 '당연히' 비밀은 가져도 된다고 합니다(저를 담당했던 심리 전문 상담사님이 그러셨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니 까요.


물론 위에서 말한 각종 위험 부담(심리적 부채감 등등)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함께 살아갈 상대에게 적당히 솔직해지면 조금 더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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