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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pr 21. 2023

나는 내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기괴했던 산세리프체의 등장

작업실 벽 중앙에 건 포스터는 ‘삶’이다.

수년 전 이직을 앞둔 백수로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다. 오후 5시쯤 나른한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폐업 처분 속옷을 판매하는 가게를 우연히 지났다. 가격과 제품명을 손으로 쓴 종이들이 알록달록 붙어있는 가게였다. 주인 아저씨가 맑고 또렷한 눈빛과 기쁜 얼굴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노랗게 반짝이는 노을과 사장님의 행복한 모습이 어우러진 순간 속옷가게가 한없이 예뻐 보였다. 종이를 붙이면서 콧노래를 불렀을 사장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떤 삶을 사셨기에 중년인 당신에게 젊은 내게 없는 안광이 나는 건지, 나는 부끄러웠다.


잘 산다는 건 저런 게 아닐까. 언제 어디서든 나에게 주어진 일을 즐겁게 하는 것. 삶의 태도는 내가 있는 곳의 가치를 높인다. 새 직장 출근을 앞두고 복잡한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집에 돌아와 바로 포스터 작업에 들어갔다. 실제 속옷 가게에 있는 글자를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리고 ‘삶’글자로 배치했다. 그 후 포스터를 완전히 잊고 살았다. 삶에 치이고 지기 일쑤였다.


삶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던 것이 삶이다. 내 삶을, 나 자신을 사랑하려야 사랑할 수 없었다. ‘삶’ 포스터에는 삶을 한 번쯤 사랑하고 싶은 애증이 담겼다.


많고 적음, 높고 낮음을 비교하지 않고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기쁘게 살고 싶다. 길에서 만난 속옷가게 사장님처럼 삶을 사랑하는 태도를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포스터를 액자로 만들어 걸었다. 앞으로 다움웍스 작업실의 주제는 삶이다. 다 인생 잘 살려고 하는 짓이다.


다움웍스는 내 이름은 황다움에서 가져왔다. 나다움, 참다움,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이다. 내 이름 뜻처럼 나는 나답고 참다운 아름다움을 발현하며 살고 있는가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세상이 가라는 대로 앞만 보고 달렸다. 질주하던 인생에 프리워커는 첫 브레이크였다.


프리워커가 되고 오롯이 혼자가 되어 보낸 시간이 나를 살렸다. 기계처럼 쉬지 않고 돌아가던 삶을 멈추니 그제야 내가 보였고, 한 번도 챙겨보지 않은 나를 챙기고 싶어졌다. 뭐부터 챙겨야하는지 몰라 어색했지만 조금씩 나를 알아갔다. 사람과 단절하고 나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이유를 탐구했다.


변명이든 핑계든 원인을 찾고 싶었다. 사람이 왜 이리도 힘든지, 나는 왜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지, 장면을 복기했다. 남탓 오지게 하고, 내 탓도 징하게 했다.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때로는 자아에 고립되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 (성장과 회복을 방해하는 매우 건강하지 않은 방식이다.) 그럴 때마다 혼자 있던 동굴에서 나오게 해준 건 “다움아 뭐해, 떡볶이 먹자!”, “주말에 나들이 가자”라고 말해주는 다정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말 없이 나를 믿고 기다려준 부모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나 혼자 산다고 살아지는 게 아니었다. 함께 사는 이들이 서로의 자리를 지키며 나까지 지켜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동안 사람을 피하고 살았어?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이 질문에 대답은 ‘내가 부족해서’이다. 별 거 아닌 상황에 좁은 내 마음이 뾰족이 상처를 냈다. 솔직하면 쉬운 일을 남을 배려한답시고 솔직하지 못해 도망갔다. 나 또한 사람이면서도 사람 마음을 전혀 몰랐다. 내면의 부글부글한 불안과 열등감에 나는 물론 타인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릇이 작아서 사람을 품지 못했다. 이런 나를 언제나 한결같이 품어준 내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 조금씩 사람을 배워갔다.


‘나는 이제 나를 위해 살고 싶어. 나를 사랑하고 싶어.’


삶을 사랑하기를 머리로는 알아도 실행은 어려웠다. 언행불일치의 삶을 계속 살고 있다. 삶을 사랑하기에는 많이 모자라고 부족한 형편이었다. 사랑할 만한 구석이 딱히 없었다.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기에는 글쎄,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 어느 이별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면 사랑할 수 있을 거야! 성장하자. 사랑하기 위해 열심히 경쟁했다.


강남 공유 오피스에 들어가면서  연간 매출, 매달 평균 매출, n개 서체 런칭 등의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모든 목표들을 예상보다 일찍 이루었다. 그런데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성취감과 보람, 나 자신에 대한 기특함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감흥이 전혀 없었다. 목표를 어렵지 않게 달성하여 희열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았나 싶어 상향 조정했다. 목표를 이루고도 충만하지 못했다. 가져도 누리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나서 채우고 또 채워도 자꾸만 새어 나갔다. 그렇게 나는 내일이 되면 또 찾아올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경쟁자, 어제의 나와 매일 경쟁을 벌였다.


충만해지고 싶다. 목표를 달성해서, 돈을 벌어서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충만을 이루고 싶다. 이 작업실에서 내 삶에 경쟁이란 단어를 지우고 싶다. 가진 것에 만족하며 기쁘게 살고 싶다. 많고 적음,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싶다. 지금 나는 내게 붙은 경쟁이란 세리프를 떼는 중에 있다.

세리프(Serif)란 서체의 획 끝에 꼬리처럼 튀어나온 부분을 말한다. 나는 세리프를 서체의 눈꼬리, 입꼬리라고 생각한다. 세리프의 높낮이, 각도와 모양에 따라 서체의 표정이 달라진다. 서체 디자이너로서 세리프는 다양한 변주를 만들고 싶은 대상이다. 세리프가 조금만 달라져도 서체의 목소리 톤이 달라져 비트는 재미가 상당하다.


산세리프(Sans Serif)의 산(sans)은 프랑스어로 ‘~없이’를 뜻한다. 따라서 산세리프는 세리프가 없는 서체를 말한다. 최초의 산세리프 서체는 1816년 윌리엄 캐슬론 주조소의 책에 등장한 이집션이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며 산세리프는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서체가 되며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리프체의 긴 역사와 비교했을 때 산세리프체는 태어난 지 불과 20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신생아이다.


서체에 당연하게 붙어있던 세리프가 덥석 사라지니 당시 사람들은 많이 당황스러웠나 보다. 산세리프체를 처음 본 사람들은 기괴하다고 반응했다. 그래서 초기에 산세리프체는 그로테스크(Grotesgue)라고 불렸다. 산세리프가 보기에 어찌나 이상했으면 이름을 그로테스크라고까지 했을까.

헬베티카(Helvetica), 유니버스(Universe), 에어이얼(Arial)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들이 산세리프 서체이다. 현재 산세리프체를 기괴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감히 없을 것이다. 간판에도 산세리프, 스마트폰 UI, UX도 산세리프, 유튜브에도 산세리프, 세상에 온통 산세리프체다. 오히려 이 모든 산세리프체들을 세리프체로 바꾼다면 과거로 돌아간 듯 이질감이 느껴질 것이다.


세리프의 삭제는 당시 사람들에게 기괴한 인상을 주고 놀라게 했지만 산세리프체는 현재 우리의 일상에 녹아든 서체가 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의심하지 못한 세리프를 잘라냈을 때 세상을 바꾸고 나를 바꿀 수 있다. 이전과 달라진 내 모습에 이상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아주 잘하고 있다는 의미이니 안심하자. 세리프를 잘라내고 그로테스크라고 불린 것처럼 모든 새로움엔 이상함이 따라온다.


나의 끈질긴 세리프, 경쟁은 역사가 길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남들과 출발선이 달라 아무리 노력해도 동일 선에 설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고, 대학에 가서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워낙 집안 형편이 어렵다 보니 가난이 우선순위가 되는 장학금들이 몇몇 있었고, 그런 장학금에 예외 없이 해당이 되는 가난 덕에 등록금을 모두 메울 수 있었다.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서 형편이 여유로워지거나 남들과 동등한 출발선에 오르는 건 아니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쉬지 않고 알바를 했다.


여대의 특성상 미팅을 많이 한다. 동기들의 대화에서 이번 학기에 몇 개의 미팅을 나갔다느니, 지난주엔 어느 학교랑, 이번 주는 저기 학교랑, 미팅에서 만난 애랑 카톡 중이야, 등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난 그 대화에 낄 수 없었다. 미팅에 나갈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다. 과제와 알바로도 부족한 시간이라 미팅은 내 선택지에 있지 않았다. 동기들이 나가서 노는 동안 내가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 장학금을 노려볼 수 있겠다 싶었다. 얘들아 더 많이 놀아줘.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동기들을 학점으로 이겨야만 했다. 그래야 등록금 고지서를 받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기에, 친구들을 꼭 이겨야만 했다.


취직을 하니 사회에는 경쟁할 사람들이 더 가득했다. 상사의 컨펌과 동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클라이언트의 만족을 위해 이 세상 모든 디자이너들을 이겨야 했다. 당장 옆에 있는 직원들보다 잘해야 했고, 핀터레스트에 꼿은 레퍼런스보다 좋은 시안을 만들어야 했기에 모든 레퍼런스들을 만든 디자이너들보다 잘하고 싶었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가 되어 유명해지고 싶었다. 무엇보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내가 매번 질 수밖에 없는 돈을 이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독한 경쟁자를 만났다. 바로 어제의 나이다. 오늘이 되면 어제의 나는 도태된 과거로 남는다. 어제의 스코어는 아침이 되면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게임이 시작된다. 어제의 내가 훌륭해도 오늘 다시 처음으로 리셋. 매일 경쟁이 끝내지 않았다. 어제보다 오늘 더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일을 더 잘해야 하고, 더 건강해야 한다. 쳇바퀴에 스스로 올라타 끝없는 질주를 하고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했다. 뾰족한 정신 같은 뾰족한 눈빛, 푸석한 마음처럼 푸석한 표정, 황경쟁은 모나게 생겼다. 아, 무엇을 위한 경쟁이란 말인가.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나대로 충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습관이 된 경쟁은 단숨에 없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남들을 비교하며 질투했고, 내 성장을 비하했다. 경쟁이라는 세리프를 조금씩 지우고 있는 중이지만 기어코 나는 흐릿하게 남은 자국을 따라 세리프를 선명히 다시 그린다. 경쟁에 자주 되돌아갈 때마다 슬프다. 경쟁에게조차 지고 있는 나자신이 한심하다. 결국 경쟁과 경쟁하고 있는 꼴이다.


경쟁이 아닌 나의 꿈과 행복을 목적으로 삼았더니 이제 그 꿈과 행복에 집착했다. 꿈을 더 빨리 이루고 싶고, 더 많이 행복하고 싶었다. 행복을 가지려고 또 아등바등. (행복하기 1등이 될거냐! 진짜 돌았나?) 깊이는 때론 지나침이 되어 나의 발목을 잡는다. 잘하고 있음에도 더 잘하려는 완벽주의는 내게 갈급함을 더한다. 결점 없는 사람 없고, 완벽한 날이 없는 게 인생인데 무결점의 삶을 바랐다. 내 꿈과 행복에 작은 티끌 하나가 튀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껏 살아오던 방식을 한 번에 버리긴 쉽지 않다. 성적 순위로 우등생과 열등생이 나누어지는 경쟁을 어렸을 때부터 하며 살아온 K-학생으로서, 경쟁 사회의 한복판을 지나는 젊은이로서 경쟁은 뾰족한 세리프로 내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완전히 경쟁을 잊고 나답게 잘 산 것 같은 날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나를 온전히 사랑한 날에는 기쁘면서 불안하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이러다 뒤처지는 거 아닐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치고 행복을 바라면서 행복하니까 불안한 자신이 이상하기만 하다. 그리고 다시 생각을 고친다. 지금의 내가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건 새로워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니 마음껏 기괴해도 좋다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내가 되길 바란다. 가만히 있는 나도 사랑할 줄 아는 내가 되길 바란다.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가진 게 없어도 오늘 하루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웃을 줄 아는 내가 되길 바란다. 부디 이 모든 기쁨을 혼자만 가지지 말고 주변에 나누길 바란다. 이제는 바깥으로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나는 현재 세리프를 지우고 아주 예쁘고 나다운 산세리프 서체가 되고 있다. 나라는 산세리프체가 어떻게 생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지만 분명 나답게 특별할 것이다. 낯섦을 반기고 기괴함을 추구하는 태도가 나라는 서체를 만들기에 조금 불편하고 때론 이상한 지금의 나를 충분히 더 사랑해 주려 한다.


그런데 경쟁이란 세리프를 가진 과거의 나도 그 자체로 매력 있고 예뻤던 것 같다. 그 시절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그동안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다. 세리프를 잘 살려 멋진 글자를 만들어볼까? 뭐가 됐든 상관없다. 다 나니까. 서체를 만들며 나의 삶도 다시 만들고 있다. 나의 내일은 어떤 서체로 써질지 기대된다.



“사실 전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나를 사랑하지 못함을 고백했을 때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준 사람이 있다.

그녀를 이 작업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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