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Jul 22. 2023

다음 작업실은 꼭 2층 이상으로 가리라

거리에서 만난 이상하고도 귀여운 이웃들

때가 되면 등장하는 단골손님 지물포 사장님. 오늘의 용건은 무엇일지 도통 종잡을 수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니 기대가 자동으로 되네! 들썩들썩! 근데 웬만하면 오지 마세요!! 저 혼자 있고 싶어요!!


“한게임 바둑 머니 충전을 해야 하는데 이거 좀 도와줄 수 있나? 미용실이 지금 바쁘다네”


바둑은 공짜로 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한게임 전용 문화상품권을 구매하여 일련번호를 입력해 충전해야 게임이 가능했다.


“5만 원이면 6개월은 바둑 둘 수 있어. 그 정도면 엄청 싼 거지. 어디 가서 5만 원이면 밥 한 끼잖아. 우리 집사람은 이거 가지고 맨날 뭐라 해. 게임에 돈 쓴다고 말이야”


사장님은 가게에 사모님이 안 계실 때 슬쩍 나를 찾아와 부탁했다. 사모님한테 이를까! 사모님, 사장님이 글쎄 5만 원이나 충전하셨어요! 제가 사장님 게임머니 충전해 드리려고 작업실에 월세 내는 겁니까!


사장님이 편의점에서 5만 원짜리 한게임 상품권을 사왔다. 이 상품권을 게임머니로 바꾸는 것은 이제 내 몫이다. 사장님은 입력 창을 찾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엄마가 공인인증서 때문에 매일같이 나를 찾는 모습과 닮았다. USB 담아 둔 공인인증서는 왜 매번 없어지는지, 엄마는 자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어떻게 매번 헷갈려 하는지 도통 종잡을 수 없다. 엄마에겐 짜증을 부렸지만 생판 남인 사장님에게는 친절모드다. 엄마 미안.


게임 머니에 돈을 써본 적이 없는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게임머니를 충전하는 역사적인 경험을 했다. 세상 살이에 실질적인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다만, 이거 재밌는데..? 충전 완료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바닥난 게임 머니 잔고의 뒷자리가 우수수 늘어났다. 현실 세계의 돈 5만 원이 가상 세계에서 9억 원이 되는 광경을 보니 기적을 일으킨 것 같은 뿌듯함이 일었다. 이것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총에 총알을 만땅으로 채운 것과 같지 않은가. 나는 그 군인의 든든한 조력자인셈. 내가 없으면 전쟁에 못 나가요. 근데 스스로 총알 장전을 할 줄 모르는 군인이면 실력 없는 거 아니냐고. 그런 군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냐고.


“허허 내가 많이 이겨야 돈을 안 잃는데 말이야 허허”

“사장님 많이 이기세요!”


사장님께 진심을 담아 화이팅을 외쳤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가장인 사장님이 많이 이겼으면 좋겠다. 당신의 유일한 취미 생활인 바둑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도배 일이 많아져 돈을 많이 벌고 바둑 둘 시간이 적어지면 더 좋겠다.  





작업실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리에서 만난 그들은 이상하고도 귀엽다.


어느 날 백발의 할아버지 세 분이 작업실 앞에 서서 수다를 나누고 계셨다. 그 대화가 유리창을 타고 들려왔다.


“어제 선 봤어. 성이 곽 씨여”


곽 씨 여인과 선을 봤다고 자랑하는 할아버지의 신난 목소리가 귀여워서 혼자 피식했다. 내가 아직 도달하지 않은 나이, 그쯤 되면 감정이 무뎌지고 초원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사랑은 나이가 들어도 무뎌지지 않는 건가 보다. 할아버지의 로맨스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기회가 되면 다시 할아버지를 만나 수다 떨고 싶지만 낯가림에 먼저 말을 걸지 못하는 나는 그저 상상만 한다. 할아버지, 사랑이 뭐예요? 또 듣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가 거리에 울렸다.


리모델링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작업실 현관 프레임이 거울처럼 반짝인다.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옷매무새를 단장하는 아주머니. 실내에 내가 있는 걸 모르고 주의 깊게 화장과 옷가지를 살폈다. 어디 중요한 곳에 가는 길인가 보다. 부디 좋은 만남 있으시길. 나는 그들을 구경한다. 관심 없고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니까 보는데 귀엽다. 다들 저마다의 삶을 꾸리며 살고 있구나. 눈을 드니 사람이 보였다.


연령대가 매우 높은 이 동네에는 요양보호 센터와 한의원이 한 집 건너 있다. 흔하디흔한 카페는 100m에 하나 겨우 있을 정도이다. 폐 종이를 모으는 리어카와 전동 휠체어가 많은 거리다. 아침 출근길에는 산책하는 노부부를 만난다. 몸이 불편한 아주 작은 할머니의 두 손을 꼭 붙들고 키가 훤칠한 할아버지가 한걸음 앞서 걸으신다.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 최소한의 운동으로 아침마다 동네 한 바퀴 걸으시는 듯하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노부부를 본다. 저렇게 같이 나이들어 가면 좋겠다는 상상을 문득한다. 누구 하나 먼저 가는 사람 없이 두손을 꼭 잡고 걸을 수 있는 동행은 의외로 흔하지 않음을 한 살 한 살 들어가며 알게 되었다.


아빠의 퇴임식에서 어떤 목사님이 축사로 이런 말을 했다. “은퇴할 나이가 되기 전에 은퇴를 못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죽어서. 이때까지 건강히 살아 은퇴식을 하니 감사입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축하받을 일이다. 그것도 건강히 살아서 자기 몫의 일을 다한다는 건 큰 축복이다. 젊고 건강한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이만하면 나쁘지 않지? 아니, 근사하지!


때때로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꾹 내렸다. 도를 아십니까가 문을 똑똑, 2인조 사이비 포교꾼들이 ‘유익한 강의 알려드려요’하면서 문을 똑똑, 눈빛과 걸음걸이가 섬뜩한 남성이 불쑥 문을 열어 여기 뭐 하는 곳이냐고 물어보고 가면 문을 걸어 잠그고 올렸던 블라인드를 내렸다. 살면서 마주칠 일이 없을 법한 사람도 마주치게 되는 곳이 도보 앞 1층이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하루의 타이밍에 등장하여 평화롭던 흐름을 끊었다. 일수 대출 전단지와 중국집 전단지는 아침마다 어김없이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 밤사이 누군가 피고 버린 담배꽁초가 작업실 앞에 있는 날이면 어휴, 혀를 끌끌 찼다. 다음 작업실은 꼭 2층 이상으로 가리라 매일 다짐하게 되는 곳. 그렇지만 나에겐 2년의 계약 기간이 있다. 어떻게든 2년은 여기에서 살아내야 한다. 까짓것 살아내지 뭐.


블라인드는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다시 올라갔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따뜻하니 블라인드를 올려야만 했다. 남향 작업실에 쏟아지는 빛을 실컷 누려야 한다. 따뜻한 햇살에 찬 몸이 녹으면 딱딱했던 어제의 마음도 눈 녹듯 사르르 녹았다. 그럴 수도 있지, 저런 사람도 있지, 언제나 내가 원하는 사람만을 원하는 타이밍에 만나는 법은 아니지.


도보 한복판의 1층 작업실은 매일 다른 풍경과 사람 속에 나를 놓았다. 내 안으로 고립된 시선을 버리니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을 기웃기웃. 나는 세상과 새롭게 균형을 잡아가는 초입에 들어섰음을 막연히 짐작했다. 나를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게 단련 할 균형임을 직감했다.


사람이 들어올 마음의 틈이 기어코 내게도 생겼다. 이 마음의 틈은 천천히 열려가고 있었다. 이제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섬유 공예 선생님으로 남녀노소 많은 수강생들을 만나야만 했다.


이전 05화 동료가 필요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