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없이 여름나기
폭염이 기승하던 8월, 어느 날 갑자기 에어컨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람은 이내 뜨거워지고 순식간에 실내가 후덥지근해졌다. 에어컨도 더위에 지쳤나. 체온과 맞먹는 기온에 머리가 우지끈한 여름이었다.
에어컨 수리 기사님을 부르면 돈이 든다. 움직이는 대로 다 비용으로 연결되는 자영업자는 무엇이든 셀프가 먼저다. 인터넷에 에어컨 고장 시 대처법을 검색했다. 콘센트를 뽑았다가 다시 가동해 봐라, 두꺼비집을 내렸다가 다시 올려봐라, 여러 방법들이 나왔다. 이리저리 시도했지만 에어컨은 여전히 뜨거운 바람을 냈다.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결국 A/S를 신청했다. 제일 빠른 예약이 일주일 뒤였다. 집집마다 쉬지 않고 풀가동 된 에어컨이 많이 아픈가 보다. 일주일, 딱 일주일만 참자! 일주일 후에 기사님이 에어컨을 고쳐줄 테니 잠시 쉬어가자. 카페와 집을 오가며 일을 했다. 듀얼 모니터와 안락한 의자 없이 일하느라 라운드 숄더와 거북목이 더 심해진듯했지만 그래봤자 단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뒤 기사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했고 에어컨의 사망을 선고했다. 고쳐질 거라 당연히 생각한 에어컨이, 중고로 구매한 내돈내산 에어컨이 망가졌다. 실외기 모터 고장이 원인이었다. 기사님은 모터 값이 에어컨 값이니 새걸 하나 장만하는 게 낫다고 했다. 이제 곧 9월이고, 작업실 계약은 올해 12월 말까지다. 가을이 되면 더 이상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된다. 한 달 정도 남은 막간 더위에 새 에어컨을 구매하는 건 계산에 맞지 않다. 에어컨을 사지 말자. 작업실 계약도 연장하지 말자.
입추가 지나고 3일간 비가 내렸다. 더위가 한풀 꺾였으니 작업실에서 일을 해도 괜찮을 날씨 같았다. 드디어 작업실에 들렀다. 전등을 환히 밝히고 환풍기를 켠 후 청소를 했다. 웅- 하고 시원하게 돌아가던 환풍기와 천장 조명이 탁! 소리를 내며 일제히 꺼졌다. 오랜만에 듣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효과음, 두꺼비집이 내려간 소리였다. 하다 하다 전기까지 나갔다.
건물 주인에게 바로 연락하여 전기 기사님을 불렀다. 셀프로 처리하지 않았고 내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월세살이의 보람을 느낀 대목이었다.
기사님의 진단은 전기는 이상이 없고 천장 습기로 인해 내려간다는 것. 오래된 작업실 건물은 천장에 빗물이 스며 바닥으로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습기가 마르면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습기를 잡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에어컨이 돌아가지 않아 실내는 계속 한증막이다. 환풍기가 연결된 천장 전기가 나가서 환기를 시키기 어렵다. 이 와중 월세는 계속 나간다. 나는 작업실을 쓸 수 없는데도 자릿세를 내야 한다. 한창 꼬여버렸다. 잘못될 게 아직도 더 남은 걸까. 스트레스가 켜켜이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밀착해서 쌓인다. 사랑하는 공간인 작업실이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다. 허탈함이 밀려온다. 나의 자리를 지키고 영위해 나가기가 지치고 힘들다.
오늘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집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자마자 한숨이 푹 나왔다. 작업실 천장은 비가 더 스미겠지. 전기가 들어오려면 아직 멀었구나. 허무함이 다시 밀려왔다. 스트레스 받을 때는 상황에 속지 않도록 몸을 움직여 정신을 분산해야 한다. 산책, 산책을 가자!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었다. 산책길에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한 중년 여성분을 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의 풍경이었다. 작업실 유리창 밖을 보며 맛있는 커피와 좋은 책 한 권을 읽는 아침 풍경. 내가 잃어버린 풍경. 에잇, 산책도 짜증 난다. 다 짜증 나!!!! 지긋지긋한 자영업자, 진절머리 나 으으.
이대로는 안된다. 변화해야 한다. 올해 초부터 이직의 필요성을 감지했고, 여름 내내 이어진 작업실 악재를 통해 확실해졌다.
1인 스튜디오의 한계는 명확했다. 스타 디자이너가 아닌 이상 1인분의 분량만큼만 일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는 스타 디자이너가 되지 못했다. 이것도 나의 역량의 한계이다. 일한 지 5년 차를 지나며 디자인은 익숙하고 때론 쉽다고도 느껴진다. 이대로 혼자 작업실에 짱박혀있다간 성장해야 할 때 성장하지 못한 채 멈출 것 같다. 법이 바뀌어 나이는 아직도 29살이다. 뭐야 나 아직도 이십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나의 상황과 조건에서 현명하게 판단하자. 성장해야 하고 성장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과 환경이 필요하다. 회사의 소속, 팀의 팀원으로 일하고 싶다. 이직을 하기 좋은 시기이다.
3년 만에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그간의 활동들을 쭉 정리하니 참 열심히도 살았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다. 숱한 위기도 기회로 만들어 거뜬히 넘어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내면을 단단히 꾸려 간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더 이상 여한이 없다.
가을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가을은 내가 가장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계절이다. 급격히 떨어지는 기온과 큰 일교차에 마음도 건강도 오르락 내리락한다. 그런 가을을 올해는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쾌적할 것이다. 날씨가 건조해지면 천장 습기가 마를 것이다. 그때쯤이면 나의 다음 경로가 결정됐길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내 몫의 일을 즐기면서 기다리기.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이 적절한 때가 온다. 나의 다음 장은 어디일까. 다음에 머물 곳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직을 결정하고 취업 지원을 하면서 쓰는 <도보 앞 1층 작업실에서 살아남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니 마음이 가고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연재해 보련다. 파도에 저항하기 보단 흐름을 읽고 그 흐름에 올라 타 물놀이를 해야 즐겁고 편안하다는 걸 혼자 일한 3년 동안 배웠으니까.